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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영 칼럼
KAL 007편의 비극
2022. 08. 28 by 울산제일일보

지구 주위에는 수천 개의 인공위성이 밤낮없이 돌고 있다. 떠 있는 높이에 따라 저궤도 위성, 중궤도 위성, 고궤도 위성으로 나뉘며, 각각의 목적과 임무도 다르다.


저궤도 위성은 200~1천500km 상공에서 지구를 선회하는 위성으로 주로 정찰, 탐사, 기상관측에 사용되고 있다. 고궤도 위성은 적도 상공 3만6천km에서 지구의 자전주기와 같이 도는 정지위성으로 주로 통신에 사용된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으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GPS 위성은 보통 1만km 정도의 중궤도를 선회하는 위성인데, 원래는 미국에서 군사 목적으로 개발하여 사용하던 것이다. 이런 GPS 위성의 사용 범위가 어떻게 민간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었을까? 여기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이에 대해 모르는 이가 의외로 많아 몇 자 남겨 본다.


1978년 4월 20일, 파리를 출발하여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거쳐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이하 KAL) 902편 보잉 707 여객기가 소련 영공을 침범했다가 소련 요격기에 격추당해 소련 무르만스크 지역의 얼음 덮인 호수에 불시착하고 만다. 사고의 원인은 항법상 실수였다. 항로에서 크게 벗어나 소련의 군사시설이 밀집한 지역으로 진입했던 것이다. 당시의 항법은 관성항법장치가 일반화되기 전이라 주로 LORAN이라는 지상 기지국에서 보내주는 신호들을 기반으로 삼각측량 하듯 계산해서 항로를 설정하는 방식이었다. 만일 지상 기지국 고장으로 신호가 수신되지 않을 때는 항공기에 탑승한 항법사가 자이로컴퍼스, 나침반, 육분의, 태양 방향 등을 이용하여 수동으로 계산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의 KAL 902편은 불행히도 LORAN의 신호도 못 받았고 심지어 자이로컴퍼스도 고장 난 상태였다. 그다음 의지해야 할 나침반은 북극항로의 특성상 자북극 근처에서는 크게 오차가 발생할 수 있었다. 실제로 902편은 자북극 근처를 지나면서 경로에서 크게 벗어나 소련 영공으로 진입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소련이 쏜 미사일이 빗맞았고 조종사의 노련한 동체착륙 덕분에 탑승 인원 109명 중 2명만 사망한 데 그친 일이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1983년 9월 1일, 뉴욕의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출발해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거쳐 김포국제공항으로 향하던 KAL 007편 보잉 747이 소련 영공에 깊숙이 진입하여 비행하다 사할린 근처 모네론섬 부근 상공에서 또다시 소련 요격기에 격추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번엔 탑승객 269명 전원이 사망했고, 국적기 사상 최악의 사고였다.


ICAO(국제민간항공기구)의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007편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은 조종사의 과실이었다. 007편 조종사들은 이륙 이후부터 격추당할 때까지 비행기의 항법 옵션을 INS 관성항법유도 모드로 설정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나침반 모드를 유지했다. 즉 5년 전의 902편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 것이다. 이때는 관성항법유도장치가 일반화되었음에도 이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 찰스 린드버그가 대서양을 횡단할 때 사용했던 원시적 수단인 나침반 방위만 보고 가는 방식을 비행 내내 사용했다.


사망자 중에는 미국 상원의원을 포함하여 미국인 62명, 일본인 51명 등 외국인이 절반 이상이어서, 이 사고의 여파는 국제적으로도 엄청났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이 사고를 계기로 군사용으로만 사용되던 GPS 정보를 민간에게도 제공할 것을 공표했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서방국가에서는 민항기 항법용으로 INS 대신 GPS가 표준으로 자리 잡았고, 이후 GPS 기술은 지상에까지 내려와 우리 모두가 거의 매일같이 사용하고 있다.


곧 KAL 007편이 격추된 날인 9월 1일이다. 아마 그들의 희생이 없었으면 아직도 ‘내비’ 없는 세상에 살고 있거나 아니면 상당히 비싼 사용료를 내고 ‘캐비’를 사용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세월은 휘발유로도 지워지지 않는/ 페인트 얼룩도 지운다.// 세월이 지우는 게 어이 얼룩뿐이랴?/ 돌같이 단단한 마음도/ 세월 앞엔 모래성이다. (김시종 시인의 ’세월‘ 중에서)” KAL 007편 사고가 난 지도 어언 39년이 지났다. 이 글로나마 아픈 기억의 모래성이 무너지는 걸 지연코자 한다.

전재영 코렐테크놀로지(주) 대표이사/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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