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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영 칼럼
날도 더운데 詩나 읊조리자
2022. 08. 03 by 울산제일일보

소싯적엔 긴 글이 좋았다. 특히 섬세하게 분위기를 길게 묘사한 글들이 좋았다.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마리아브론 수도원의 입구는 이중의 기둥이 떠받치는 아치형 구조로 되어있고, 그 앞의 길가에는 밤나무가 한그루 서 있었다. 그것은 옛날 로마 순례자의 한 사람이 가지고 온 남국의 유일한 기념품으로 줄기가 시원스럽게 뻗은 밤나무였다, 하늘하늘한 가지를 길 위에 부드럽게 늘어뜨리고는 바람 속에서 가슴 가득히 숨을 쉬며, 수도원의 호두나무까지 벌써 불그스레한 어린 잎새를 달고 있고 주위의 모든 나무들이 파릇파릇하게 된 때에도, 이 나무만은 오랜 시간 잎이 돋기를 기다렸다가 밤이 가장 짧을 무렵이 되면 무성한 잎새 사이로 가냘프고 희끄무레한 푸른 이삭 같은 색다른 꽃들을 내밀었다. 그 꽃은 무엇인가 사람에게 경고하듯이 가슴을 답답하게 죄는 듯한 짙고 역한 향기를 풍겼다.’

대학에 갔을 때는 철학과 선불교에 매료되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매일 공염불만 되뇌었다. 다음은 반야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의 한 구절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의 현상들은 영원불변한 게 없다. 시간의 흐름과 장소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유전할 뿐이니 일정한 실체가 없는 비어 있는 것이니라(空). 삼라만상은 물질적인 현상(色)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이처럼 실체가 없이 비어 있고(空) 그렇다고 텅 비어 있음(空)이 물질적인 현상(色)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곧 있고 없음이 다름이 아니다. 있음은 없음 그 자체요, 없음은 동시에 있음이로다. 감각(受), 지각(想), 의지(行), 지식(識)도 마찬가지여서 있는 것인 양 보이지만 실상은 텅 빈 것이요, 텅 빔 속에서 있는 것으로 끊임없이 나타날 뿐이니라.’

이후 결혼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삶이 바쁘다는 이유로 주로 가벼운 단편소설이나 수필, 신문의 칼럼들을 읽었다. 그중에서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조선일보에 연재되던 ‘이규태 코너’가 아닌가 싶다. 주로 당시의 사건이나 이슈에 대해 폭넓은 지식과 화려한 필력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그중 한 토막이다.

‘탤런트, 가수, 모델 등 인기인 30여명에게 유방 확대 수술을 해왔던 무자격의 한 간호보조원이 구속되었다.// 유방 콤플렉스의 개연성에 놀라게 된다, 그렇게 유방은 클수록 좋은 것일까. 다산과 풍년이 절실했던 고대사회에서는 이를 고루 충족시켜주는 대유 숭배의 습속이 있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강화조건으로 젖이 큰 대유녀 3,000명을 차출, 청 태조의 고향인 만주 영고탑에 이주시킴으로써 인구 번성을 노렸으며// 우리 한국 여성의 62%가 유방 콤플렉스에 걸려 있다던데 그것은 비너스 망상이다,’

50대 이후에는 주로 시나 시조를 읽고 있다. 눈도 침침해지고 하는 일 없이 바쁘다 보니 짧은 시간 내에 읽을 수 있는 시가 좋아진다. 처음에는 칠언율시(七言律詩) 같은 긴 한시(漢詩)를 해석하는 재미에 한때 몰입도 했었지만 점점 쉽고 명료한 우리 시와 시조에 더 끌리고 있다.

요즘같이 무더운 밤에는 서재의 조명을 낮추고 선풍기 바람을 쐬면서 시 한 수 읽고 맥주 한 모금 마시며 시를 읊는다. 이러다 보면 더위는 안드로메다 너머 시원의 우주로 날아간다.

‘매아미 맵다 하고 쓰르라미 쓰다 하네/ 산채(山菜)를 맵다더냐 박주(薄酒)를 쓰다더냐/ 우리는 초야(草野)에 묻혔으니 맵고 쓴 줄 몰라라’ (청구영언 중에서.)

은둔에 대한 동경은 예로부터 전래되어 온 한국인의 특성인가보다, 박목월 시인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한다/ 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꽃처럼 살아라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한다/ 바람처럼 살아라한다.’

코로나가 다시 창궐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런 와중에 일부 생각 없는 위정자는 내수경기 진작을 이유로 적극적으로 휴가를 권장하고 있다. 재창궐이 몹시 우려된다. 이번 휴가는 코로나도 잡을 겸 집에서 은둔하며 시나 읊조리며 여름을 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전재영 코렐테크놀로지(주) 대표이사/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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