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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심산책
농부의 탄식
2022. 06. 19 by 울산제일일보

극심한 가뭄 속에 이틀 동안 단비가 와서 발걸음도 가볍게 비닐하우스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튀어 오른 흙을 잔뜩 뒤집어쓴 상추와 고추 여러 포기가 보였다. 천정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상추와 고추는 숨이 막혀 죽겠으니 빨리 흙 좀 씻겨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놈의 구멍, 그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네, 넘넘 미안하구나.’

하우스 구석에서 삼각사다리 발판을 가져와 이랑을 가운데 두고 세웠다. 내 키보다 높은 상단 발판에 올라가긴 했는데, 일어서려 하니 몸이 긴장되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리도 떨린다. 하우스 천정에 쭉 이어진 가로대를 두 손으로 잘 잡아야 안정된 자세로 뚫린 구멍을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허리를 반쯤 펴는 즉시 가로대를 향해 팔을 뻗었다. 두 손으로 가로대를 잡고 나니 긴장되고 무서움으로 가득 찼던 머리가 확 풀렸다. 몸을 이리저리 돌려 구멍을 어떻게 수리할지 살펴본다. 좀 더 잘 보려고 허리를 곧추세우는데 어이없게도 삼각발판이 넘어져 버렸다. 잡고 있던 가로대를 놓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아래를 보니 상추와 저쪽 고추들이 대롱대롱 매달린 나를 보고 잎을 바짝 세우고 있다. 가로대를 놓고 그냥 떨어지면 충격이 심할 것 같아, 있는 힘을 다해 ‘원숭이 나무 타듯’ 가로대를 타고 땅으로 내려왔다.

구멍을 막을 비닐 테이프를 호주머니에 넣고 칼도 챙겼다. 넘어진 삼각발판을 다시 세웠다. 발판 다리가 땅에 잘 박혔는지 흔들어보고 균형이 잘 잡혔는지도 보았다. 여전히 떨리고 긴장되지만 처음 올라갈 때보다 덜했다. 마지막 발판에 올라 모든 것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허리를 빠르게 펴면서 위쪽만 바라보고 일어섰다. 가로대를 잡으려는 순간 몸이 공중에 붕 뜨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왼쪽으로 통나무처럼 ‘쿵’ 떨어졌다. 허리와 머리가 연달아 땅에 부딪혔다. 그냥 멍하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단지 머리가 세게 부딪혀서 뭔가 잘못될지 모른다는 생각 외에는.

그대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이 돌아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머리 쪽 땅은 움푹하게 패이고 몸 아래 허리 곡선 모양으로 짓눌린 땅에는 납작해진 상추가 종이처럼 붙어 있었다. ‘부드러운 흙이 아니었으면 ……’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일어서자 온 천지가 까맣고 어지러웠다. 왼쪽 팔꿈치가 아파 오고, 왼쪽 허리도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목을 만지니 목 뒤가 질겅거렸다. 한참 목을 만지고 숙여보고 돌려도 보았다. 움직일 때마다 아팠으나 견딜 만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삼각발판의 걸쇠 하나가 낡아 제대로 걸리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멍한 몸을 추스려 땅거미가 내린 길을 따라 집으로 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온몸에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목도 더 뻣뻣해져서, 자꾸만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아내가 일을 마치고 집에 와 있었다. 아내는 요양보호사 일을 하느라 나 혼자 농사를 짓는다. 힘없이 엉거주춤 걸어 들어오는 나를 보며 왜 그러냐고 묻는다.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내 팔을 들어보고는 눈살을 찌푸린다. 왼쪽 팔꿈치부터 손바닥까지 멍이 퍼렇게 들어 있다. 대뜸 “내가 전부터 사다리를 새 걸로 바꾸라 안 했나. 두 번 다시 농사짓지 마라!”고 매몰차게 말한다. “상추하고 고추 흙 씻어줘야 하는데 우짜노.” 내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탄식하니, 아내는 “당신이 중하지 상추하고 고추가 중하나?”고 꾸짖는다. 아내의 목소리가 떨린다. 사랑하는 나의 태양, 아내의 눈에는 이슬이 비친다. 비닐하우스에는 그 이후 보름 동안이나 가지 못했다.

박경만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 울산광역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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