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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영 칼럼
오데사 계단의 피눈물
2022. 03. 03 by 울산제일일보

1925년에 개봉된 영화 ‘전함 포템킨’이 있다. 현재까지도 천재 영화감독이라 칭송받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연출한 영화다. 필자도 젊은 시절에 그 명성에 반해 발품을 팔아가며 어렵사리 비디오테이프를 구해보고는, 흑백 무성영화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엄청난 스케일과 박진감 넘치면서도 섬세한 연출력에 반한 바 있다.

따지고 보면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체제 당위성과 우월성을 ‘프로파간다’하기 위해 만든 불순한 의도의 영화다. 그럼에도 영화사에 길이 남을 영화기법과 명장면 때문에 후세의 많은 영화들에서 ‘오마쥬’될 정도로 수작 중의 수작이다.

때는 아직 제정 러시아 시절인 1905년이고, 장소는 흑해를 항해 중인 전함 포템킨이다. 문제의 발단은 구더기가 들끓는 썩은 고기를 수병들에게 식사로 제공한 것이다. 구더기가 나오는 음식을 먹으라는 장교들에게 화가 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때마침 정박 중이던 오데사의 시민들까지 동참하면서 반란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때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제정 러시아 짜르의 군대가 등장하는데, 시민들과 수병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게 된다. 여기에서 세계영화사에 길이 남을 ‘오데사의 계단’ 장면이 나온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다가 총탄에 쓰러지는 시민들, 엄마가 쓰러지면서 홀로 계단을 굴러 내려가는 유모차, 바닥에 나뒹구는 깨진 안경, 울부짖는 여인 등의 장면들이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교차하면서 휘몰아친다.

이렇게 전함 포템킨 수병과 오데사 시민의 반란은 진압되고 만다. 그러나 이를 효시로 러시아 전역으로 크고 작은 민중 봉기가 불길같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마침내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는 막을 내리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이 탄생하게 된다.

우크라이나 남부의 흑해 연안에 위치한 오데사는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풍광으로 예로부터 유명한 관광도시이자, 세계 3대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 흑토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의 수출항으로 유명하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이유로 오데사의 역사는 험난했다. 14세기부터 제노바 공국, 오스만 제국, 스페인 등이 차례로 지배력을 행사했고, 19세기 중반 크림 전쟁 기간에는 영국과 독일 해군의 포격으로 시가지 상당 부분이 파괴됐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와 루마니아군에 격렬히 저항하다 6만여 명의 시민이 죽거나 다쳤다.

수많은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아름다운 도시 오데사가 또다시 전쟁의 화염에 휘말리고 있다. 러시아의 새로운 짜르로 불리는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이다. 기존의 친러시아 세력권인 동부지역 외에도 수도 키에프와 가까운 북부지역과 남부지역인 오데사가 공격대상이고, 이들 지역에 수백 발의 미사일을 쏘아대며 탱크를 앞세워 물밀 듯 쳐들어간 것이다.

역사상의 모든 전쟁을 돌이켜 보면 최소한의 명분이 있기 마련인데, 이번 침공은 아무리 눈을 닦고 찾아봐도 이렇다 할 만한 명분이 없다. 마치 중국이 우리나라를 속국으로 지배하고 싶어 하듯, 러시아 입장에서 봤을 때 우크라이나가 벨라루스처럼 말 잘 듣는 속국이길 바랐는데, 그들의 뜻에 반하기 때문에 본때를 보여주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조폭 두목 같은 푸틴의 판단 미스와 이를 필터링 못 하는 독재국가의 한계가 이번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이렇듯 명분 없는 전쟁에 동원된 러시아 군인들 역시 사기가 높을 리 없고, 반면에 21세기의 대명천지에 느닷없이 침공을 당한 우크라이나 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기세다. 예상과는 다르게 이번 전쟁은 장기소모전으로 갈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전 세계의 경제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다.

117년 전 오데사 계단의 피눈물이 당시에는 봉건적 농노제에서 사회주의적 독재체제를 낳았다면, 이번의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피눈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주의적 독재체제로 복귀하려는 시도에 대한 저항의 피눈물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하지만 늘 같은 방향으로 도는 건 아니다. 이번 전쟁이 사회주의 독재정권들이 사그라지는 계기가 되기를 절실하게 바란다.



전재영 코렐테크놀로지(주) 대표이사·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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