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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영 칼럼
문득 ‘길가메쉬 서사시’가 생각난 까닭은?
2021. 12. 12 by 울산제일일보

최근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검색어 순위에 ‘길가메쉬’가 떡하니 상단을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연유를 알아보니 할리우드 마블 영화의 한 캐릭터가 다름 아닌 ‘길가메쉬’였고 이 역할을 한국인 배우가 소화해낸 것이었다.

필자가 예전에 쓴 글에서도 길가메쉬를 언급한 적이 있어, 놀라운 한편 반갑기도 했다. 구약성경보다도, 그리스신화보다도 오래되었다는 ‘길가메쉬 서사시’를 찾아 떠나보자.

길가메쉬는 대략 기원전 2천600년경인 고대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왕조 초기 시대의 전설적인 왕으로 실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수천 년의 잠적을 깨고 갑자기 현세에 나타난 것도 ‘마블 영화’만큼이나 극적이다. 18~9세기경 메소포타미아를 탐사하던 서구의 고고학자들이 수메르의 고대도시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소위 ‘쐐기문자’라고 알려진 다량의 점토문자판이 발굴되었는데, 이를 해독하기가 무척 어려워 20세기 중엽쯤 돼서야 길가메쉬 서사시라고 알려진 대략 2천 줄의 문자가 해독된 것이다. 해독된 길가메쉬 서사시의 가치는 대단해서 많은 학자들은 이를 그리스신화의 원형으로 보기도 하고 구약성경의 모티브로 보기도 한다. 심지어 인문학의 효시라 보는 학자도 적지 않다.

필자는 길가메쉬 서사시를 3단계로 분류한다. 첫 단계는 길가메쉬의 탄생과 군주로서의 폭정을 묘사한 단계로, 많은 신들이 등장하고, 신과 인간과의 갈등, 신들 간의 알력 등 마치 그리스신화를 방불케 한다. 길가메쉬 역시 2/3는 신이고 1/3은 인간인 반신반인으로, 용맹과 위력은 신 급이지만 영생하는 신과는 달리 필멸의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두 번째 단계는 신과 같은 영생을 얻고자 먼 길을 떠나며 우여곡절을 겪는 단계인데, 이는 호메로스 서사시 ‘오딧세이’와 사막을 방황하는 모세를 연상시킨다. 또한 곳곳에 마치 구약성경을 보는듯한 글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신이 인간을 벌주기 위해 대홍수를 일으켜 인류를 절멸케 했다는 것은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고, 우여곡절 끝에 영생의 불로초를 구했으나 오는 길에 독사에게 뺏겨서 영생의 기회를 놓친 것은 아담과 이브가 독사의 꼬임에 넘어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것을 연상시킨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필멸의 존재로서 죽음을 맞는 단계인데, 필자는 이 단계를 가장 좋아한다. 앞 절에서의 허황된 신화가 아니라 매우 인간적인 나약함과 인생에 대한 희로애락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필자 역시 길가메쉬 서사시가 인문학의 효시라는 데 적극 동의한다. 필자가 자주 읽는 한 대목을 음미해보자.

“길가메쉬, 자신을 방황으로 몰고 가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요? 당신이 찾고 있는 영생은 발견할 수 없어요. 신들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인간에게는 필멸의 삶을 배정했고, 자신들은 불멸의 삶을 가져갔지요. 길가메쉬, 배를 채우세요. 매일 밤낮으로 즐기고 매일 축제를 벌이고 춤추고 노세요. 밤이건 낮이건 상관없이 말이에요. 옷은 눈부시고 깨끗하게 입고 머리는 씻고 몸은 닦고 당신의 손을 잡은 아이들을 돌보고 당신 부인을 데리고 가서 당신에게 즐거움을 찾도록 해주세요. 이것이 인간이 즐길 운명인 거에요. 그렇지만 영생은 인간의 몫이 아니지요.”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인간답게 살다 가라는 의미이다.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묘사도 인상적이다. 현재의 종교가 생기기 이전에 쓰인 글이라 그런지 지극히 인간적이다.

“영웅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온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죽음의 바다를 건너 영생자를 만나고도 끝내 영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 영웅은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그 어떤 고독도 죽음 앞에서 힘겹다는 말을 할 수 없다. 그것은 한낱 사치일 뿐이다. 죽음은 절대 고독이며 고독의 극치이며 고독의 끝이다.”

최근 절대권력을 누렸던 두 명의 전(前) 대통령이 잇달아 죽음을 맞았다. 그들은 제대로 된 삶을 살았으며 겸허하게 죽음을 맞이했을까. 문득 ‘길가메쉬 서사시’가 생각난 까닭이다.

전재영 코렐테크놀로지(주) 대표이사/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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