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울산제일일보
뒤로가기
전재영 칼럼
‘피의 성전(聖殿)’, 예루살렘
2021. 06. 20 by 울산제일일보

‘사방에 군대를 보내 머리를 가진 자는 머리를 숙이게 하고, 무릎을 가진 자는 무릎을 꿇게 하였다.’ 이 글은 8세기경부터 10세기 사이에 ‘실크로드’ 전역에 대제국을 세운 튀르크인들이 점령지 곳곳에 세운 전승 비문 중 하나에 기록된 내용이다. 이처럼 짧은 시간에 실크로드뿐 아니라 중동지역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동로마제국 비잔티움의 영토였던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정복하면서 현재에도 진행 중인 갈등의 불씨를 제공하게 된다.

이때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였던 알렉시우스 1세는 ‘성지인 예루살렘이 이교도에게 점령당했다’며 서로마제국의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당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한다. 즉 유럽 내 여러 제국의 왕들을 굴복시키고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고자 ‘성지인 예루살렘이 짐승 무리에 점령당해 형제들이 고통받고 있으니, 이들을 구원해주자. 이 성전(聖戰)에 참여하면 모든 죄가 사해지고 천국에 갈 수 있다’며 선동한 것이다. 그러자 여러 제국의 영주와 기사부터 가난한 천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천국행 티켓을 얻기 위해 대장정에 올랐고,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짓게 된다.

거룩한 ‘성지 탈환’이라는 목표로 원정에 올랐으나, 이들은 곧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이들을 지원하기로 약속한 비잔티움 황제가 아나톨리아 반도를 탈환하자 더 이상의 지원을 거부하며 이들을 배신한 것이다. 보급이 끊기자 이들은 굶주림과 피로에 찌들어 약탈자로 변모한다. 아나톨리아 반도부터 레반테 지역을 지나 예루살렘에 이르는 원정지 내의 모든 도시가 약탈과 학살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대장정 3년 만인 1099년에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이 탈환전 역시 참혹했는데, 당시의 참상을 기록 일부를 빌어 소환해보자.

‘이 전쟁은 신의 이름을 내건 성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들은 무슬림과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성안의 모든 사람은 비종교적인 방식으로 살육당했고, 심지어 부녀자들까지 살육함으로써 피의 성전이 된 예루살렘 성안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이런 잔인한 만행의 배경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선동이 있었다. 즉 이교도는 짐승과 같으니 죽여도 무방하고, 그럼으로써 속죄하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망언이 큰 확신을 준 것이다. 이 전쟁으로 인해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이때부터 타종교와 이민족에 대한 혐오와 배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약 천년 후, 예루살렘은 다시 세계무대의 맨 앞에 나오게 된다. 1948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거주지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겠다고 하면서였다. 예루살렘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3대 종교의 성지가 모두 모여 있는 곳으로, 또다시 ‘피의 성전’이 될 것을 우려한 유엔은 총회 결의안을 통해 예루살렘을 국제법상 어떤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지역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1967년 3차 중동전쟁 후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전역을 점령하였고, 이후 수도를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공식 이전하게 된다. 하지만 유엔 안보리는 즉시 이를 국제법 위반으로 결의하였고, 이에 따라 현재까지 이스라엘에 있는 각국의 대사관과 대표부는 예루살렘 대신 텔아비브에 있으며, 사실상 텔아비브가 이스라엘의 행정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2017년 12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뜬금없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주재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전하라고 지시하면서, 새로운 불씨를 지폈다.

지난달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간에 공습과 로켓포를 동원한 무력충돌이 있었다. 하도 자주 발생하다 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 지역의 분쟁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우르바누스 2세와 트럼프가 떠오르는 건 필자만의 생각일까.

전재영 코렐테크놀로지㈜ 대표이사·공학박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