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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영 칼럼
백석과 자야가 생각나다
2021. 04. 06 by 울산제일일보

백석(白石)을 알게 된 건 약 30년 전, 그의 시(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접하면서다. 백석에 대해 잘 몰랐던 당시에는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의 아류쯤으로 여기고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 ‘여승(女僧)’이라는 백석의 또 다른 시를 읽게 되었고, 그만 백석에게 풍덩 빠지고 말았다.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중략]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하략]’ 총 4연으로 된 그리 길지 않은 시인데, 마치 16부작 대하 드라마를 본 듯했다.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백석의 생년은 1912년이다. 비슷한 연배로 1913년생인 소설가 김동리와 1910년생인 시인 이상이 있다. 그런데 백석은 이들에 비해 거의 알려진 게 없었다. 이유는 월북 작가였기 때문이다. 1987년 해금되면서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향수’의 정지용 시인도 이때부터 세간에 알려졌다. 고향이 충북 옥천인 정지용은 바로 복권이 되고 지역의 명사로 추앙되고 있다.

그러나 고향이 평안도 정주인 백석은 그를 띄워줄 지역적 배경이 없었다. 그저 후배 시인들이 그를 기리고 따랐을 뿐이다. 백석은 ‘시인의 시인’으로 불렸다. 윤동주 열사는 그를 열렬히 흠모했다고 전해지며, ‘별 헤는 밤’도 백석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연탄재 시인 안도현도 ‘백석 평전’을 쓰며 그를 기렸고, 소설가 김연수는 ‘일곱 해의 마지막’이란 소설로 월북 이후 참담했을 마지막 생애를 묘사하며 그를 추모했다. 하지만 세간에는 이런 후배 문필가들의 노력보다 다른 일화로 더 알려지게 된다.

다름 아닌 ‘자야’와의 러브스토리 때문이다. 백석이 1936년 조선일보 기자를 그만두고 함경도의 한 고보(高普)에 선생님으로 내려갔을 때, 어떤 회식 자리에서 서울서 내려온 기생 ‘진향(김영한)’을 운명적으로 만나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리고 김영한에게는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서 ‘자야(子夜)’라는 아호도 지어 준다. 당시 일어, 영어에도 능통했던 백석은 틈틈이 러시아어도 배웠는데, 앞서 언급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나오는 나타샤가 바로 자야였다. 열렬히 사랑했건만 결국 둘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이별하게 되었고, 이후 ‘대원각’이란 요정을 차려 큰 재산을 모은 김영한이 천억 원이 넘는 전 재산을 시주하며, 뱉은 이 한 마디로 둘 다 유명해졌다. “천억 원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

얼마 전엔 서양음악 원류의 하나라는 그레고리안 성가(Gregorian Chant)를 우연히 듣던 중 ‘정마리’라는 정가 가수가 부르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게 되었다. 남성 합창으로 웅장하게 부르는 것과는 달리 여성 독창으로 청아하게 부르는 걸 듣다 보니 묘한 중독성이 생기는 게 아닌가. 전통 창(唱)이라면 판소리나 서도민요가 떠오르는데, 정가라니 몹시 낯설었다. 그래서 정가를 공부하던 중에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가(正歌)’는 민간에서 주로 불렸던 ‘속가(俗歌)’와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으로, 주로 왕실과 사대부가에서 불렸다. 또 정가의 범주에는 시조, 가곡, 가사 등이 포함되며, 우아하고 절제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정가를 계승, 발전시키면서 정마리한테 전수한 이가 바로 자야 김영한이었다. 평생 백석을 그리워하며 독신으로 지냈던 김영한은 서울대에 장학금까지 쾌척하며 후계자를 키웠고, 1997년에는 ‘창비’를 통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여 뛰어난 시인들에게 상을 주었다. 시상하는 때가 백석의 생일 무렵이라는 것도 흥미롭다.

코로나19에 지치고, 혼탁해져 가는 세상살이에 분노하면서도, 미세먼지 속에서 푸른 하늘을 꿈꾸는 이들이여! 가끔은 정가 한 자락에 백석의 시 한 편 곁들이며 심신을 정화하고 스스로 위안하는 건 어떻겠는가.

전재영 코렐테크놀로지(주) 대표이사/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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