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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심산책
잎이 꽃보다 아름다울 때
2020. 04. 14 by 울산제일일보

환경에 따라 꽃이 되지 못하고 잎이 되는 운명이 있다. 잎은 주목은 받지 못해도 광합성작용으로 자양분을 꽃눈으로, 열매로 보낸다. 꽃을 찾아 쉼 없이 날아다니는 일벌도 비슷하다. 같은 조건에서 로열젤리(royal jelly)를 먹은 벌은 여왕벌이 되어 벌의 세계를 지배하고 장수를 누린다. 하지만 일벌은 죽을 때까지 일만 하도록 운명 지워져 이 꽃 저 꽃을 끝없이 찾아다닌다.

사계절 중에 유독 잎이 꽃보다 아름다운 때가 있다. 바로 지금이다. 벚꽃이며 화려한 봄꽃에 식상해 있을 즈음 일제히 고개를 내미는 것이 수많은 잎들이다. 너무도 오묘한 색감에 우리는 홀리듯 황홀경에 빠져든다.

단풍나무의 신록은 연붉은색과 노란색 잎의 조화로 봄에도 잠깐 만산홍엽- 가을단풍의 화사함을 우리에게 선보인다. 이렇듯 신록을 치장하는 나뭇잎들은 저마다 무지개 색을 감추기에 바쁘다. 그 숱한 잎들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색감은 은은하고, 햇살 받은 여린 잎들이 흔들리는 바람결에 보여주는 색의 조화는 잔잔한 전율마저 느끼게 한다. 이 시기에는 잎이 돋아나는 속도도 빨라 아침저녁으로 다른 모습으로 자태를 뽐낸다. 신록이 기지개를 켤 즈음 첫 잎들은, 꽃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태양을 향해 얼굴을 내민다. 꽃이 되지 못해 항의라도 하는 걸까. 사실은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많이 받으려는 본능적 몸부림이다. 다양성 속에서 잉태되는 조화로움은 거대한 자연의 하모니다.

봄이면 복수초가 얼음 속에서 방끗 미소를 지으며 봄기운이 얼음장 밑에서 시작됨을 알린다. 연이어 봄의 상징 변산 바람꽃이 피고, 봄 오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려는 듯 노루귀가 우리 곁을 찾아온다. 뒤를 이어 제비꽃, 양지꽃, 산자고와 화려하고 다양한 색깔의 현호색 붓꽃이 신록이 그늘을 이루기 전 땅바닥에 몸을 기댄 채 앞 다투어 꽃을 피운다.

나무는 생강나무, 산수유를 시작으로 개나리, 진달래, 목련에 이어 벚꽃이 봄의 문을 두드린다. 이들은 꽃을 먼저 피웠다가 지울 때쯤 잎을 내기 시작한다. 봄이 짙어 가면 꽃이 먼저 피는 참꽃 진달래와 꽃과 잎이 같이 피는 연달래 즉 철쭉 개꽃이 얼굴을 내민다. 사무실 앞 화단에는 붉은 명자꽃과 춘궁기 배고픔의 상징이던 분홍색 박태기, 흰 쌀밥이 생각나는 조팝나무 꽃이 연이어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렇게 봄꽃들이 작품을 완성할 무렵 고개를 들어 먼 산을 보면 신록은 들불을 연상시킨다. 산 아래에서 위를 향하여 은은한 노란색, 주황색, 연두색 물감을 뿌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봄의 산은 여름철 벽공(碧空)에서 피어나는 뭉게구름을 닮은 신록의 구름이 빚어놓은 컬러(Color)의 공간으로 변한다.

이즈음 민들레가 지천인 밭둑에서 캐낸 쑥과 냉이, 어린 머위는 하나 둘 봄의 밥상을 점령하기 시작한다. 나무두릅의 새순과 개두릅인 엉개, 가죽, 옻나무 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봄나물과 새순도 뒤질세라 건강한 한방(韓方)의 밥상을 차린다. 이렇게 잎이 꽃보다 아름다운 시기의 신록은 눈과 귀에다 우리의 오감까지 뒤흔들면서 봄과 사람을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로 빠져들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이 신록의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코로나19로 마음과 경제 모든 것이 힘들고 어려운 시기이지만 그래도 신록은 우리들 곁을 어김없이 파고든다. 주말에는 갑갑한 일상을 씻어낼 겸 한적한 숲을 찾아 ‘녹색 샤워’를 즐기도록 하자. 이렇게 변함없는 자연의 수레바퀴 속에서 우리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날마다 새로워지고, 나날이 발전한다는 뜻)’의 위안을 얻기도 한다.





윤주용 울산시농업기술센터 소장·농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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