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지켜온 성곽 성곽 못지킨 울산
울산 지켜온 성곽 성곽 못지킨 울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3.31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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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방(關防)유적과 도시디자인
한삼건교수의도시이야기

- 日·유럽 도심성곽 관광 0순위
- 도시디자인 전면 재검토 필요

일본이나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도시마다 아름다운 성곽이 있고, 그것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것을 볼 수 있다.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 그런 성곽들은 관광대상지로도 손색이 없지만 무엇보다도 그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고 상징이 되고 있다.

 

▲ 왜군에 의해 허물어진 울산읍성의 석재로 1597년 축조된 울산왜성(학성공원).

우리나라에도 성곽이 도시의 상징이 돼 관광지로 주목받는 곳이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수원시내에 있는 화성을 들 수 있고, 남한산성, 고창 모양성, 해미읍성, 낙안읍성, 성읍민속마을 등을 들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적어도 고려건국 이후 울산의 성격을 결정지었다고 생각되는 울산의 관방유적과 도시디자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시대 왕권강화·방어 거점 울산

고려의 건국과 함께 신라가 멸망하게 되자 수도외항으로 독점적 대외 교역기능을 담당하던 울산의 위상은 급격하게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고려 6대 임금인 성종(재위 981-997)이 995년에 흥례부였던 울산고을의 이름과 지위를 공화현으로 낮추면서 ‘학성’이라는 별호를 하사한다. 같은 해에 경주는 ‘동경유수부’에서 ‘동경유수사’로 바뀌고, 1012년에는 ‘동경’이라는 지위에서 강등돼 ‘경주방어사’가 설치됐다. 이런 가운데 997년에는 성종이 직접 울산과 경주를 방문했는데, ‘고려사’에 의하면 성종은 ‘태화루에 올라서 연회를 베풀었으며, 동해에서 큰 물고기를 잡고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전한다. 이런 움직임은 고려 건국 후 왕조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앞 시대의 수도였던 경주와 그런 경주의 외항으로서 대외교역의 최대 거점이었던 울산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동해에서 잡았다는 큰 물고기는 이 지역의 지배세력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어쨌든 성종은 경주와 울산에서 추진한 일이 힘들었는지 개경으로 돌아간 직후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다.

 

▲ 울산 병영성의 체성 외벽과 내벽 구조, 해자(성 주위에 둘러 판 방어용 못), 치성(성 위에 낮게 쌓은 담) 등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필자의 고려왕조 울산 견제설은 현종때의 사건으로도 설명이 된다. 즉 목종을 이어서 즉위한 고려 8대 임금인 현종(재위 1009-1031)은 즉위 3년차인 1011년에 울산과 청하, 흥해, 영일, 장기 등에 축성을 명한다. 그 전년인 1010년에 거란의 30만 대군에 의해 개경까지 함락당하자 왕은 우리역사상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나주까지 몽진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거란을 물리치자 마자 1012년에는 다시 경주에도 축성을 한다.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경주와 경주외곽의 해안도시를 중심으로 한 축성임을 알 수 있다. 즉, 신라 수도 경주와 울산을 비롯한 항구도시에 축성을 하고 중앙군, 또는 외관을 파견해 이들 지역에 대한 고려 왕조의 지배력을 강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현종은 1014년에는 다시 경주를 안동대도호부로 승격 시키고, 이어서 1018년에는 공화현이었던 울산을 ‘울주’로 올려 준다.

고려 초의 울산을 둘러싼 이러한 움직임은 국내정세와 거란과의 전쟁, 그리고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한 제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이후에는 여기에 일본 해양세력의 대륙진출이 더해지면서 울산은 자연스럽게 한반도 동남의 대왜 방어 거점이 돼갔다. 1011년의 울주성 축성에 대해 고려사에서는 동여진의 해적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했지만 성종대 이후의 여러 사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 소도읍육성사업 등으로 남문 복원공사가 진행중인 언양읍성.

지역성격 보여준 관방유적

그러면 현종때 축성된 성이 어디일까. 필자는 두 가지 가설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반구동성지’로 알려진 동천강변 서원산 일대의 성곽 유구를 그것으로 보는 것이다. 1991년과 2006-2008년 사이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이 성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목책과 고려시대에 조성된 토성 유구가 함께 드러났다. 또한 건물지에서 출토된 연화문수막새 등의 유물은 7세기 전반의 고급한 것이어서 신라왕경과의 연관성이 짙어 보인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에는 이곳에 바다를 통한 대외 교역관련 시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신라 말기에는 박윤웅 세력의 거점으로 목책이 갖추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어서 997년에 성종이 울산을 찾으면서 박윤웅 세력이 제거되고, 목책도 철거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1011년에 목책이 있던 곳에 고려 중앙정부가 파견한 외관, 또는 중앙군을 위한 토성 축성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다른 하나는 충의사 뒷산의 토석 혼축성 유구가 1011년에 축성됐을 가능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 성을 성벽축조방식이나 성벽자리에서 수습되는 기와편,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서 고려 우왕때인 1385년에 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당초 1011년에 이 자리에 성을 쌓았고, 이후 13세기부터 약 1세기에 걸친 몽고 간섭기를 거치면서 방어기능이 떨어졌다가, 특히 1350년 이후의 극심한 왜구침입으로 이 일대가 황폐화된 것으로 본다. 이때 파괴된 울산성이 새로 고쳐 쌓아진 것이 1385년의 축성으로 생각된다. 필자는 이 성이 ‘세종실록지리지’등에 보이는 ‘고읍석성’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이후 이 고읍성은 조선초 세종8년(1426)까지 경상좌병영으로 사용되다가 좌병영이 합포로 이설되면서 방치됐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경상좌도병마절제사영성 축성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이 성은 조선 태종 때 경주에서 울산으로 옮겨온 경상좌병영을 위한 성으로 1417년에 축조됐으나 완성 직후에는 왕명에 의해 일반 백성과 울산지군사가 근무했다. 그러다가 1437년에 앞서 10년간 마산으로 합쳐졌던 좌병영이 울산에 다시 설치되면서 이곳에 거주하던 백성과 울산지군사가 지금의 북정동 일대로 옮겨갔다. 이 때문에 세조연간의 왕조실록을 보면 울산읍성 축성 논의가 자주 나타난다. 그 후 읍성이 없는 상태로 40년이 흐른 1477년에 북정동에도 읍성이 새로 축조되니 이것이 ‘울산읍성’이다. 하지만 이 성도 정유재란때인 1597년에 왜군에 의해 허물어져서 석재는 울산왜성(학성공원) 축조 공사에 사용됐다.

고려초부터 정유재란때까지 약 500년간에 걸친 울산지역 중심부의 성곽축성에 대해 살펴 보았는데, 한 고을에 시기(신라, 고려, 조선)와 성격(호족성, 읍성, 병영성, 왜성)이 각기 다른 성곽이 밀집돼 축조된 예는 국내에서도 따로 찾기 어렵다. 그만큼 울산은 대외교역이 성하고, 또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해양세력 방어에 적합한 전략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성곽, 즉 관방유적은 고려 이후 울산의 성격을 결정짓는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급격한 성장으로 잃어버린 문화

그런데 이렇게 많은 성곽유적을 가지고 있는 울산에서 수원 화성에는 못 미치더라도 낙안이나, 고창읍성 정도로 정비된 성곽이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울산이 급격하게 성장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고창은 일제강점기 이후 시가지가 성 바깥을 중심으로 성장했고, 낙안읍성은 조선시대에는 현의 중심이었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승주군에 통합돼 행정적 중심성이 사라진 덕분에 개발바람을 피했고, 그 결과 성곽이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울산에도 이런 예가 있다. 즉, 언양읍성이나 병영성이 그나마 국가사적이 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 언양현이 울산군에 합쳐진 때문이고, 병영 역시 조선시대에는 그 격이 울산도호부보다 높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모든 중심기능이 폐지되고 울산군에 흡수됐기 때문에 개발 바람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62년 이후의 울산공업단지 개발은 겨우 문화재로 지정된 병영성도 성벽 일부만 명맥을 유지하게 했고, 여타 성곽도 시가지 개발이나 공단개발로 숨통이 멎을 지경에 이르도록 했다. 이는 지역의 핵심문화 유산인 도심 성곽을 고려한 도시발전 전략을 짜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일제강점기에는 병영성과 울산객사 문루(태화루) 보존 운동이 일어났던 적이 있었지만, 해방 후의 도시 성장기에는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이처럼 20세기 중반 이후 나타난 유사 이래 가장 대규모로, 가장 빠른 속도로 우리 도시가 개발되면서 울산의 원점이던 성곽은 그 존재조차 희미해져 버렸다. 전쟁으로 파괴되고, 우리보다 앞서 개발바람을 맞으면서도 성곽을 잘 지키고 가꾼 다른 나라 다른 도시가 성곽을 도시의 상징으로, 관광포인트로 활용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될 수는 없을까.

최근 울산에서는 희망적인 움직임도 보인다. 울산읍성 성벽 자리는 중구지역 주택재개발과 맞물려서 역사공원으로 지정돼 있고, 언양읍성은 소도읍육성사업 등과 맞물려서 현재 읍성 남문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병영성은 동문에서 북문에 이르는 구간의 정비가 일단락됐고, 북문에서 서문에 이르는 구간은 현재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학성공원도 왜성 유구가 잘 드러나게 가꾸어지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일부 연구자의 주장만 반영해 자칫 소중한 문화유산이 정비라는 이름하에 오히려 훼손되는 일이 없지 않다는 점과 문화유산의 현상 보존만을 너무 절대시해 이를 미래지향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그 성격을 왜곡시키는 경우도 보인다는 점이다. 어느 것도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도심 성곽유구를 활용한 도시디자인을 시도하고자 한다면 인구 저성장과 고령화가 닥쳐오고, 부동산 광풍이 숨을 죽이고 있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새로운 시대변화와 패러다임 변화에 주목해 도심성곽 문화재 가치를 극대화하고, 도시발전의 기폭제로 삼기 위한 도시계획 재정비가 요구된다. 구체적으로 성곽 주변의 토지이용계획 조정과 새로운 도시디자인 프로그램을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 울산만의 개성 넘치는 도시디자인은 도심 성곽유적 활용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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