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위 가장 외로운 곳 산업화 허리를 돌보다
바다위 가장 외로운 곳 산업화 허리를 돌보다
  • 양희은 기자
  • 승인 2012.12.04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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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상 원유부이 최초 근무자

● 유조선 원유 육지 이송 중간다리 역할

“부이의 모습은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그 때의 근무자들은 이제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내 기억 속의 부이, 처음 봤을 당시의 생경함, 출퇴근의 어려움들도 조금씩 잊혀지고 있습니다.”

1963년 울산 남구 용연 앞바다 2.4㎞ 지점에 설치된 원유부이의 최초 근무자 이홍상(76)씨는 1964년부터 20년간 부이를 관리했다. 부이 근무 후에는 뭍으로 올라와 육지 공장에서 15년간 더 근무했다.

부이는 유조선의 원유를 육지로 보내주는 중간다리 역할을 하는 곳이다. 유조선이 들어오면 육지 공장으로 관을 연결하기 위한 접안 시설물이다.

이씨는 “이제는 당시의 기억이 가물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며 부이에서의 근무 시절을 떠올렸다.

“원유부이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도 정확히 몰랐다”는 그는 고향인 남화동 인근이 원유탱크 부지로 결정되고, 원유탱크에서 부이까지 연결하는 파이프 라인 공사장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당시 통역을 담당했던 지인의 소개로 부이에서 근무하게 됐다.

부이에서 근무하려면 배를 운전할 수 있어야 했고, 신체도 건강해야 했다. 부이까지 직접 배를 몰고 출퇴근을 하고, 주·야간 2교대로 12시간씩 흔들리는 부이에서 근무해야 했기 때문에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었다.

최초의 부이 근무자는 이씨 외에도 5명이 더 있었다. 배를 탈 수 있는 사람만이 자격이 됐기 때문에 어촌마을인 남화동과 용연동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때 동료들 중 2명만이 살아있다고 말하는 이씨의 표정은 아쉬움으로 가득했다.

부이 근무자들은 유조선이 들어오지 않더라도 365일 24시간 부이를 관리했고, 유조선이 들어오면 관을 연결하기 위한 로프를 걸어 주는 일을 담당했다.

부이는 전체 약 60㎡로 4개의 공간으로 나눠져 1칸만 근무자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됐고, 나머지는 장비를 보관했다.

▲ 부이에 계류해 원유를 하역하는 유조선(1964).

● 무인도 같은 부이서 20년 생활

하루 12시간, 근무자 두 사람만 있어야 하는 부이에서의 생활은 흡사 무인도의 그것과 비슷했다고 기억하는 그다.

그 외로움도 힘들었지만 부이 근무에서 가장 고된 일은 출퇴근이었다. 초기 10년간은 노 젓는 배로 출퇴근을 했고, 2부이가 생기면서 회사에서 부이 출퇴근용 통선을 내줘 조금은 쉬워졌다.

노를 저어 바람을 잘 타면 20분만에도 부이까지 갈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면 1시간 이상이 걸리기도 했다. 12시간 근무라고 했지만 사실 정확한 출퇴근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배를 타고 출퇴근하다보니 정확한 시간을 지켜 오가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겨울에 바람이 많이 불면 부이에서 육지로 나오는 동안 옷이 다 젖어 꽝꽝 얼어붙어 있기도 했다. 비와 눈이 오고, 태풍으로 바람이 불더라도 부이에서 근무하고 있을 동료들을 생각해 출근을 해야 했다.

파도 때문에 부이에 접안을 하지 못해 출퇴근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기면 2박3일, 3박4일을 부이에 갇혀 있을 때도 있었다.

“가장 길게는 4박5일을 부이에서 못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바람이 잦아들고 다시 육지로 나왔더니 어지러워 발을 헛디디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교대를 못할 정도의 날씨면 부이는 더욱 심하게 흔들려 서 있지도 못했고 잠을 자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부이 안에는 침대와 간단한 생활도구들이 갖춰져 있었다. 근무자들이 도시락을 싸가서 식사를 해결했고, 기상상황 악화 때를 대비해 조리도구와 석유곤로, 쌀과 약간의 반찬도 준비돼 있었다.

근무 중에는 시간이 아주 많았다. 2명의 근무자가 함께 일했지만 거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일에 익숙해졌다. 낚시를 하거나 라디오를 듣고 책을 읽었다.

“주로 장어가 많이 잡혔고, 가자미와 게르치도 종종 올라왔습니다. 이따금은 낚시질로 건져 올린 생선들로 조금씩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워낙 위험한 곳이라 술을 먹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라디오를 듣고, 소설책이나 잡지 등을 가져가 읽으며 근무시간을 보냈습니다. 함께 일하는 근무자와 대화를 하고, 장기를 두는 것도 하루 이틀이야 가능하지만 10여년을 같이 하다 보니 그것도 힘이 들더군요.”

부이 안에서는 크게 움직이거나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근무자들에게 타고난 체력은 필수였다. 난방이나 냉방시설도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건강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똑같은 일상의 반복에 특별한 일은 없었다. 다만 원유 하역이 끝나고 배가 출항할 때까지는 유조선에서 시간을 보냈다. 큰 유조선이 들어오면 하역하는데 평균 3~4일 가량이 소요됐다.

부이근무자는 부이 관리와 경비만 담당했기 때문에 유조선이 들어와 원유하역작업을 할 때면 육지 공장에서 직원들이 배를 타고 나와 일을 담당했다.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 넓이의 파이프 라인은 터널과 같은 구조였다.

유조선은 주로 중동지역에서 많이 들어왔지만 선원들은 거의 미국 사람이었던 것으로 그는 기억했다.

1부이와 2부이에서 20여년 일했고, 이후 15년은 육지에서 공장 경비일을 맡아 2000년까지 근무했다.

● 완전철거로 사람들 기억 속에만 남아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그의 집 거실에 걸린 액자에는 장성한 아들, 딸, 손자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있었다. 가족사진을 물끄러미 보던 이씨가 말을 이어갔다.

“공단이 들어설 때도 계속 고기를 잡고, 농사일을 이어갔다면 이렇게 못 살았을 겁니다. 고향 사람들 중에는 평생 배운 것이 농사일뿐이니 두려움에 공단으로 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업이나 농업을 고수했던 사람들은 매우 드물었습니다.”

현재는 북구 연암동에 살고 있지만 가끔 고향마을과 예전 일하던 곳을 찾아가기도 한다는 그다.

“고향이기도, 일터였기도 했던 그곳을 이따금 찾습니다. 지금 여기 나를 편안하게 살게 해 준 곳이지만 고향을 삼켜버린 그 곳이 가끔은 섭섭함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실향민이 돼 버렸지만 그 곳이 없었다면 우리 가족이 지금, 여기 있지는 못했을 겁니다.”

이씨는 “하지만 그 섭섭함보다는 고향에 인구가 늘어나고, 공업화가 되면서 살기 좋아진 것에 더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씨가 처음 발을 들여 놓았던 원유1부이는 2010년 신항만 개발로 완전 철거됐다. 그의 청춘이 고스란히 묻어있던 그 곳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50년 전을 추억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만 남아 있는 곳이 돼 버렸다.

이씨의 장남은 현재 SK에너지에 근무하고 있다. 그 역시 그 곳에서 울산 공업사의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양희은 기자 yang@uj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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