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서 묵향을 맛보다
박물관에서 묵향을 맛보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11.08 22: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옛 사람의 흔적을 찾는 일은 흥미롭다. 그것이 오래된 것이거나 처음 보는 것이라면 즐거움까지 더하다. 선인(先人)들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 흔적을 남긴 주인공의 향기와 냄새가 배어나기도 한다.

토요일 오후, 울산박물관을 찾았다. ‘조선시대 문인화의 세계’ 특별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전시실에는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의 ‘금강산도’ ‘청풍계도’ ‘사직노송도’와 단원 김홍도의 ‘송하선인취생도’ 등의 진품이 망라돼 있었다. 지난 1996년 ‘The Fragrance of ink’라는 제목의 미국 전시에서 호평을 받은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소장품들이다. 희귀한 문인화 화첩과 병풍, 부채 등 152점의 진품을 본다니 이런 안복을 언제 또 누리겠는가. 울산박물관은 그림의 제목과 발문들(題跋文)을 잘 해석해 놓았다. 문인화 감상을 하는 관람객들이 작품에 대한 이해도와 깊이를 더할 수 있도록 베푼 친절이다.

박물관 2층 150여석의 강당이 꽉 찼다. 모두가 문인화에 관심이 많은 시민들이었다. 김우림 관장이 ‘그림 읽어주는 남자’로 나섰다. 문인화는 그림을 보는 것도 좋지만, 그림 속에 숨은 가치를 찾는데 더 큰 묘미가 있다고 했다. 김관장은 특유의 미성으로 전시작품을 상세히 풀어 해석해 주었다. 그는 특히 단원 김홍도의 작품에 애착을 가지며 길게 설명했다.

‘송하선인취생도’는 소나무 아래 생황을 부는 사람을 그린 그림이다. 소나무 아래에서 생황 부는 사람은 이미 취한 듯 하다. 단원은 ‘생황 소리가 용의 울음보다 더 처절하다’고 적어 놓았다. 그림 속 소나무는 용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지난 1996년 김 관장이 처음 해석해 내고 의미를 부여해 학계의 관심을 받았던 부분이다. 설명을 듣고 보니, 정말 그냥 소나무가 아니다. 껍질은 강하고 두껍다. 용의 비늘이다. 저 위쪽 왼편으로 뻗은 가지는 입을 벌리고 앞발을 내민 용의 머리를 나타내고 있다. 마치 승천하는 순간 용의 힘찬 모양새이다.

대숲에 앉으면 그냥 혼자다. 외로움을 친구 삼아 세상과 인연을 끊어야 할 것 같다. 번잡한 속세를 떠났으니 한가롭기도 하다. 잔잔한 바람에도 댓잎이 소리를 내고 달이 뜨면 조금은 쓸쓸한 채 시인이 된다. 단원의 죽리탄금도를 보는 감상문이다. 단원은 대숲에서 거문고를 타며 탈속한 노인을 그렸다. 그림을 자꾸 보면 거문고와 휘파람 소리, 차 끓이는 소리가 댓잎 소리와 함께 들리는듯 하다. 그래서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한 모양이다.

‘꽃이 피었으니 열매가 가득하리라’ 다산 정약용 선생이 매화병제도에 남긴 시이다. 설명을 들으면 가슴이 저려온다. 귀양살이 중에 아내가 보내 온 치맛자락을 뜯어서 시집간 딸에게 보내는 편지글과 그림이라니. 화선지를 구할 수 없을 정도의 유배생활도 안타깝지만 딸의 행복을 비는 글과 그림을 보노라면 대실학자도 평범한 한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림 설명이 끝나고 김관장은 전시장을 돌며 직접 해설을 맡았다. 그러면서 “그림 속 글귀를 해석하거나 시대배경을 알려주는 설명문을 꼼꼼하게 읽으라”고 했다. 그래야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숨은 이야기들이 살아나 감동의 폭이 커지기 때문이다.

울산박물관은 지난 1일 오전에 40만번째 관람객을 맞았다. 지난해 개관 이후 1년 반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달성한 성과다. 하루 평균 730여 명, 주말과 휴일에 1천100여명이 찾았던 것이다. 이만하면 울산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다. 이미 개관 6개월에 20만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지난 2002년 서울역사박물관이 개관 6개월에 20만명의 관람객을 맞았던 것과 비교해도 대견하다. 그만큼 울산의 인문학도 싹을 틔우고 있을 것이다. 박물관의 프로그램 기획이 뛰어나고 관장이 해설사로 나설 정도의 성의가 있어 그렇다.

조선시대 문인화 특별전이 끝나고 내년이면 ‘명청회화전(明淸繪畵展)’이 기다리고 있다. 남종화와 북종화를 구분해 준 화설(畵說)의 동기창과 대진 등의 진품이 온다니 벌써 가슴이 설렌다.

서권기(書卷氣)·문자향(文字香)! 올가을 약간은 외롭고 조금은 쓸쓸하지만 행복한 계절이다. ‘사랑스럽고 공기보다 가벼우면서도 의미심장한 전시’를 보았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왜 이런 전시를 빨리 보지 않는가?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