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장과 의자
완장과 의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2.06.03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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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읽은 소설 ‘완장(腕章)’에 나오는 주인공의 행동이 생각난다. 이 책을 일순간에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쓴 웃음과 함께 서글픔이 밀려온 기억이 있다. 대개 어깨에 걸치고 폼 내는 완장과 그저 샛별처럼 반짝이는 완장이 있다고 여겼다.

나에게 많은 감화를 주신 고모부가 계셨다. 그 분은 나에게 “말을 아끼고 말을 만들지 말라” 조언하셨다. 그리고 언제나 내 주장을 앞서 내지 말고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라고 하신 그 뜻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도 떠오른다. 의자에 앉으면 내려 올 뿐이다. 그리고 좋은 자리는 빼앗길 일만 남았다고 하며 겸손을 생명으로 삼으라고 일러 주셨다. 고모부님이 교장으로서 교단에서 순직하셨을 때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하지 못한데 대한 회한(悔恨)이 있었다.

완장과 의자는 권위의 상징이기도 하고 책임의 상징이기도 하다.

세상 살다가 접하는 경우 중에 회전의자를 두고 설왕설래함을 보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는데, 누구든 완장을 차고서 회전의자에 앉으면 처음에는 최선을 다하려고 했을 것이다. 다만, 천태만상(千態萬象)인 세상사가 그들의 초심을 이어가기 어렵게 할 것이다.

나는 이런 사례를 역사에서 간접경험하곤 한다.

역사상 막중한 완장을 다른 이에게 넘겨준 사례로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을 들수 있다.

경순왕이 왕자의 만류를 뿌리치고 왕건에게 나라를 내어 준 것은 비겁함이 아니었다. 어차피 나라의 기운이 다해 간다면 임금이랍시고, 하찮은 자존심을 지키려다 백성을 곤궁 속에 내몰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으리라.

경순왕은 고려 개성 땅에 볼모의 입장으로 옮겨갔고, 왕건의 배려로 낙랑공주와 재혼해 살아가면서도, 가끔 도라산(都羅山)에 올라 신라 땅 쪽을 바라보며 서라벌에 남아 있을 백성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임금이 나라를 잘못 다스리면 백성들이 온몸으로 어려움을 당함을 실감했으리라.

완장을 찬 이는 책임이 크다. 완장도 지켜야 하지만 완장을 달아준 백성을 보살필 책무도 진다.

신라의 제30대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년)이 한반도에 있는 삼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숱한 생명이 쓰려졌다.

‘왜’라는 의문사를 내 볼 겨를도 없이 백성은 목숨을 잃고 가족과의 생이별도 있었다. 문무왕으로부터 완장을 이어받은 맏아들 신문왕(神文王)은 전쟁의 상처와 아픔을 겪은 삼국의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애를썼다.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는 그런 심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여긴다. 피리로 들려주는 노래가 비록 삼국 통일은 부왕이 짊어져야 했던 숙명이라고 묘사하지만, 백성의 아픔은 무작정 임금의 아픔이었다.

오늘날 울산 땅에는 각각의 분야에서 완장과 의자가 마련돼 있다. 이런 의자는 주로 토박이들이 많이 앉아있다. 그런데 완장 두르고 의자에 앉은 분들이 가끔 책임과 분수를 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어디든지 토박이 문화가 있지만 대도시 가운데 울산은 이 부분이 심하다는 느낌이 자주 든다.

향우회 모임이 활발한 것을 그 반증으로 얘기하는 분도 있다. 종친회(宗親會)나, 화수회(花樹會)에서 고향 까마귀를 기억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울산이 비교적 유별하게 느껴진다.

나는 부산에 살다가 울산에 이사왔다. 울산에 정착한 어느날 천전리각석의 동심원을 보는데 짜릿한 느낌이 섬광처럼 다가왔다. 특이한 경험이었다. 이 글을 새긴 선사인들이 울산에 잘 왔다고 전해주는 교감이었다고 믿고 있다. 그런뒤 울산에 동화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따금 배타적 완장에 의해 울산에 사는 것에 이질감을 느끼는 수가 있다.

이런 신호를 받으면 내가 살아가야 할 이 땅, 태화강가에 넋놓고 앉아 상념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전옥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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