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면 어때
백수면 어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1.06.21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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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회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서로의 근황을 묻고 있다.

“아, 넌 요새 무슨 일하냐?”

“나? 그냥 전에 하던 거 계속 하고 있지 뭐.”

“니가 전에 뭐했더라?”

“놀았잖아.”

백수일수록 당당하라. 당신이 지방대학 출신으로 수년 째 수많은 면접만 보고 취업은 안 된다다고 주눅들 것 없다. 수백 수천번 면접할수록 당당해야한다. 아마 나중에 임원이 되면 면접관으로 적임자일 수도 있다. 기왕 이리된 것 대한민국 최고로 많이 면접 본 사람이란 자부심이라도 가지도록 하라. 아니면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중에 ‘면접의 ABC’란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라도 될 지 누가 아는가?

요즘 취업이 어렵다고들 한다. 칠팔십년대 고도성장기엔 대학 3학년이면 입도선매로 팔려나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산업이 발전하면서 인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당시 학생들은 기업으로부터 장학금 받아가면서, 아이들 가르쳐 학비 벌어가면서 졸업장만 따면 만사 오케이.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취업이 안 된다. 요즘 기업에 입사 지원하는 준비생들의 이력은 그야말로 화려하다. 토플, 학점, 영어, 활동, 프리젠테이션, MBA, 공인회계사등 각종 자격증. 그래도 취업이 안 된다. 예전같이 학생들 가르칠 시간도 낭만적인 축제의 시간도 없이 그저 공부만 해도 회사원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 오죽하면 백수생활 면할 길이 없으니 그냥 ‘놀자♬’란 자두의 노래까지 나왔을까.

이런 상황이 수년 째 되면 마치 달팽이가 껍질 속으로 몸을 숨기듯 대부분 위축되고 사람 만나는 게 부담스럽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다고 상황이 나아 질 것은 없다. 그렇다고 초조해하거나 당황해하진 말자. 그럴수록 당당할 필요가 있다. 유비가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할 정도로 인기가 하늘을 찔렀던 제갈공명의 당시 직업은 하얀 손. 그렇다 그는 백수(白手)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당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취업시켜주려 온 최고경영자 유비를 피했다. 소 위에 올라타 피리를 분다든가 고고하게 행동했다. 그러자 오히려 애가 탄 쪽은 유비팀이었다. 전화도 전보도 없던 시절 세 번 씩이나 방문해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후 드디어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 기분으로 당당히 입사했던 것이다. 물론 공명 정도의 대우를 받기 위해선 스스로의 실력을 길러 놓을 필요가 있다. 백수시절이야말로 자신의 주가를 높이기 위한 호기다. 나 자신도 20대 중반의 백수시절이 없었으면 오늘의 나는 없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미스터 김,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회사가 어렵잖아…”

총각시절 상사의 말 한마디에 백수가 되어 밖에 나와 길을 걷는데 하늘이 노래지고 눈물이 나왔다. 가뜩이나 아슬아슬한 중소기업에 입사했던 나는 사장이 회사를 접는다는 데 어쩔 수 없이 퇴사를 해야만 했다. 졸지에 백수가 되고 보니 온 세상이 우울하기만 했다. 전기 통닭집에 걸려 기름을 짜는 통닭도 불쌍하고 길가에 떨어진 낙엽도 불쌍했다. 너희나 나나 제대로 대접 못 받는 것은 같구나. 근데 웃으며 길을 가는 사람들은 뭐야? 아마 아직 안 잘렸나보지.

며칠 집에서 놀다 쉬다 하다보니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다. 아! 아침에 갈 데가 없다는 게 이리도 괴로운 일일 줄이야. 근무할 땐 그리도 가고 싶던 바닷가, 나이트클럽, 지리산도 흥미가 없고 회사에 나가는 게 그리도 고마운 것인 것을. 아침겸 점심 밥 늦게 먹고 한참을 걷다가 책방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독서에 빠졌다. 그땐 몰랐지만 그게 내겐 행운의 시작이요 불행의 종말이었으니. 책이라… 이리도 좋은 세상이 있었나. 책을 보면 볼수록 나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이렇게 중요한 지식들을 익히지 않은 상태로 내가 인생을 살았단 말야? 하루 10시간 씩 책을 읽었다. 교보문고, 종로서적, 남산 도서관, 행촌동 에스콰이어 도서관. 책을 읽으며 아침을 열었고 책을 닫으며 하루를 마감했다. 소설, 시, 수필, 세일즈, 처세, 화술, 경제 경영, 미학, 철학, 신학… 책을 열 때마다 머리가 시원해졌고 책을 닫을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 뿌듯함이 밀려왔다.

백수란 사실이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도 했다. 백수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좋은 지식들을 습득할 수 있었으리. 공명은 그 자신이 백수였기에 수많은 독서와 연구를 할 수 있었고 결과 자신의 몸값을 높이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세상에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 백수도 마찬가지다. 취업이 안되면 창업을 하면 된다. 창업도 힘들면 실력을 기를 일이다. 사향냄새는 아무리 깊은 곳에 있어도 그 향이 나는 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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