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과정에 참여하면서 나의 관점이 ‘교육 자체의 발전’이 아니라 ‘OO발전을 위한 교육’, 즉 수단으로서의 교육에 관심이 강해지게 되었다. 당연히 목적으로 하는 분야를 익히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교육학보다는 정치학, 경제학, 행정학, 사회학, 인류학과 같은 사회과학 전반을 공부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 때문에 피츠버그 대학 유학시절에는 교육학과가 아닌 타 학과에서 공부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었다. 결과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와 같은 다학문적(multi-discipline) 배경은 내가 훗날 4개 대학에서 총장으로서 직책을 수행하거나, 정부 부처에서 업무를 추진할 때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학문적인 예로서 내가 ‘한국사회과학협의회’를 맡아서 일할 때, 각계의 학자들과 큰 어려움 없이 의사소통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유학시절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러 분야에서 학문적 융합, 통섭 등을 요청하고 있어서 나의 유학 당시 사례를 소개한다. 이것은 지금도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고려했을 법한 내용이다. 피츠버그 대학에서 공부할 때, 전공을 달리하는 친구들(한영환(정치학 전공자이면서 행정학과 교수), 최상철(도시계획 전문가이면서 환경대학원 교수), 박웅서(경제학자), 신세호(안타깝게도 너무 일찍 작고한 교육학자(창의성 연구의 개척자)) 등이 나의 학문을 깊게 하고 폭을 넓히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들과 주말이면 모여서 토론을 시작하면 밤새는 줄 모르고 온갖 지혜를 짜내었다. 이 모습은 과거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조국의 독립과 발전을 걱정하며 몰래 숨어서 토론하던 선조들의 열정과 한 가지는 비슷했다. 그 때 선조들도 일본 맥주를 마시며 울분을 토해냈었는데 우리도 피츠버그의 ‘Iron City Beer’, 피츠버그가 한 때 철강도시로 번창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의 맥주를 마시며 자기 전공을 이끌어다 토론을 하였다. 그때의 토론 주제들은 ‘Development’, ‘Change’, ‘Innovation’, ‘Institution building’, ‘Nation building’ 등이었다.
얼마나 토론에 집중했는지 우리 집 앞의 길가에 박웅서 교수가 불법주차(가난한 유학생들의 주택가라도 주중 일정한 요일에는 청소를 위해 도로의 한 면은 주차할 수 없음) 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가 낭패를 당한 일도 있었다. 이렇게 불법주차를 하면 시청의 해당 부서에서 피츠버그 외각으로 끌어가 버린다(towing). 벌금을 내고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값진 만큼 우리 모두의 학문적 성취는 이룩했었다.
/ 정리=박해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