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사회
사람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사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11.24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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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 게임이 한창이다. 매일 광저우에서 전해져오는 메달 소식에 우리는 기뻐한다. 마치 내가, 아니 내 친한 누군가가 메달을 받은 것처럼 흥분한다. 국가대표선수와 우리는 이제 동일한 무엇이 된 것처럼 우리는 느낀다. 국가대표들은 단순히 국가의 명예를 걸고 경기에 임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내 명예도, 우리 명예도 함께 걸고 경기에 임한다.

국가대항전은 스포츠 경기 이상의 그 무엇인가가 있다. 그저 스포츠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눈총이 따갑다. 패배한 국가대표들에게는 단순히 스포츠 경기에서 패배한 것 이상의 비난이 가해진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국가대항전에 열광하고, 국가대표를 우리와 동일하게 여기는 사회적 인식, 그 인식의 밑바탕에는 민족 혹은 국가에 대한 사랑, 애국심이 놓여있다. 국가대항전이 있을 때마다 언론은 우리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제목으로 온통 도배를 한다. 애국심을 고양하는 사회적 분위기, 그 유력한 수단으로 스포츠,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냉철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애국심은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될 수 있는데, 잘못 발현된 애국심은 우리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배워왔다. 군사 독재정권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에도 국가와 정권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정권에 대한 충성이 아닌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가치 있는 것으로 알아왔다. 국민의례시간에 우리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면서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2007년 이후 수정된 맹세문)를 암송하곤 했다.

학교교육 등 공교육을 통해서, 또 각종 언론 등을 통해서 그렇게 드높이고자 하는 애국심은 과연 무엇에 대한 사랑을 의미할까? 애국심의 대상인 국가와 민족은 무엇일까? 우리가 투표를 통해 창출한 권력과 그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조직이 국가일까? 또 민족이란 무엇인가? 국제화되고 다원화된 현대에서 우리가 사랑해야 할 민족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단군왕검의 후손이 되는 사람들인가?

국가와 민족은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일 수 밖에 없다. 특정할 수도, 그 실체를 파악할 수도 없는 그런 개념이다. 지극히 추상적인,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우리는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리라 다짐했던 것이다. - 2007년 이전의 국기에 대한 맹세문에는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라고 되어 있었다.

정권과 국가는 다르다고 한다. 과연 이를 구별할 수 있는가? 폭압적 독재정권이 출현했다고 가정하자. 순경시험에 어렵게 합격해서 경찰이 된 사람이 그 정권에 항의하는 시위진압에 투입되었다. 시위와 진압이 점점 폭력성을 띠게 된다. 상부에서는 시위대에 발포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발포해야 하는가? 만약 발포한다면 이는 정권에 대한 충성인가 아니면 국가에 대한 충성인가?

이제 우리는 과도한 애국심을 경계해야 한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은 정권에 대한 충성으로 잘못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정권은 그 권력을 남용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랑이 놓여야 할 자리에 우리를 둘러싼 이웃, 사람에 대한 사랑이 놓여야 한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 한 국가와 민족 사이의 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랑이 사람에 대한 사랑을 압도하는 대표적인 사회현상이 아마도 전쟁일 것이다. 애국심이란 이름으로 나와 똑같이 숨을 쉬며, 나와 똑같이 그 가족을 사랑했을 사람을 살상하는 행위가 바로 전쟁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애국심을 조장하는 모든 행위에 내포된 위험성을 알아야 한다. 추상적 애국심 대신에 구체적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

/ 이태섭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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