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이 우리를 구해
낭만이 우리를 구해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09.28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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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 사항, 과목 코드, 인쇄 상태 잘 확인하고 시작종이 치면 문제를 풀도록 합니다.” 1학기 기말고사 기간에 2학년 문학 시험 감독에 들어갔다. 시험을 알리는 종이 쳤고 학생들은 분주하지만 차분하게 문제를 읽어내려갔다.

정돈된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나도 찬찬히 문학 시험지를 살펴보았다. 학창시절에 문학을 꽤 좋아했던 터라 반가운 작품을 마주할 때 추억이 되살아나기도 했고, 익숙한 작가의 낯선 작품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학생 때는 마냥 문제를 풀기 바빴는데, 교사가 된 지금은 성적과 상관없이 문학 작품 그 자체를 읽으며 긴장된 여유를 느낀다는 게 색다르면서 학생들에게 미안한 기분이었다.

교사로서 당장 수업 준비에 급급한 교재 연구에 필요한 개론서를 살펴보고 서점에서 인기 도서라는 부동산, 재태크, 과학 신기술 등 당장 먹고사는 문제와 연관된 실용적인 책들을 마주하다 고전, 중세, 현대 문학 작품을 보고 있으니 어딘가 지금 이 땅의 현실과 잠시 멀어져 보이는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새로운 지식과 최신 트렌드를 담은 책을 읽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다양한 소설, 시, 시조를 읽는 동안에는 현실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마음이 포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는데 제시문과 다른 글꼴로 적힌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선택형은 30문제입니다. 한 학기 동안 문학과 함께 해주어 고맙습니다.” 메마른 시험 시간과 시험지에서 이 문장은 하나의 낭만이었다. 학기 말은 여지없이 한 학기 동안 배운 내용을 점검하기 위한 기말고사로 바쁘다. 성적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고등학교 입시 현장에서 정기고사 기간은 특히나 많은 신경을 쓰며 챙겨야 할 것이 많아진다.

교육적으로 어떻게 평가를 통해 성장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만 동시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오류 없이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최대한 없고 오류가 없는 문항을 만드는 것이다. 창의적 사고력, 비판적 사고력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명백한 정답이 있는 문제를 만들어 이의 없이 넘어가는 것이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현실적인 부분이다. 특히 매력적인 선지를 만들어내는 객관식 시험에서 다섯 개의 보기 중 하나의 정답만을, 가장 적절할 것만을 고르도록 하는 문항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과정이고 시험을 내는 사람에게 일련의 고통을 안겨준다.

어떻게 보면 교사와 학생 간 소통과 작품 그 자체를 느낄 수 있는 감성이 거의 묻어나지 못하는 시험지에서 한 학기 동안 들였던 노력, 함께 호흡하며 만들어나간 소중한 시간,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모든 상호작용과 애정이 ‘문학과 함께 해주어 고맙다’는 문장에 오밀조밀하게 들어가 있는 것 같아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동시에 우리의 삶도 현실적 생계의 문제 속에서 피어나는 낭만으로 살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꼭 필요하지는 않아도 삶의 한쪽에서 자리매김하는 소중한 마음이 낭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굳이 적지 않아도 되지만 교사의 애틋함이 묻어나는 마음을 시험지를 통해서나마 표현하는 정성처럼 말이다.

최단 거리로 빠르게 달리는 KTX를 두고 가끔은 덜컹거리는 기차의 불편함을 감수하며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여유를 즐기고 싶은 무궁화호처럼, 길게 쭉 뻗은 고속도로 빠른 시속으로 달릴 수 있다. 하지만, 계절의 변화를 느껴가며 창밖의 풍경을 느끼고 싶어 돌아가는 옛길처럼, 빠르게 타이핑하여 전달할 수 있는 카톡을 두고 반듯하지 않은 글씨로 단어 하나하나를 골라가며 쓰는 편지 한 조각처럼 삶 속에서 굳이 없어도 되는 이러한 낭만은 때때로 필요하다고. 비효율적인 낭만은 세상을 구하지는 못할지라도 효율에 파묻혀 이따금 치고 들어오는 헛헛한 일상을 조금 더 풍성하고 정성스럽게, 따뜻하게, 잔잔하게 가꾸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조윤이 현대청운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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