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 내려온다’
‘범 내려온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02.07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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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은 순우리말이고, ‘호랑이’는 범과 이리를 함께 부르는 말이다. ‘범 없는 산에 토끼가 왕이다.’라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동물 공존 생태계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육식인 범과 초식인 토끼는 먹이사슬에서 극과 극이다. 호랑이는 단군신화에 곰과 함께 주인공으로 등장할 만큼 민중과 친근한 동물 중 하나이다. 호랑이와 까치, 호랑이에게 담뱃대 시중을 드는 토끼, 산신 탱화의 호랑이 등은 민화와 탱화에서 볼 수 있다.

호랑이는 <수궁가>에서 범으로 등장한다. 울산 대곡리 암각화에 새겨진 호랑이 그림은 과거 울산의 동물 생태계에도 호랑이가 서식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범은 한 마리가 차지하는 먹이 활동 영역이 워낙 넓어서 ‘많았다’는 표현보다 ‘서식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범의 출현은 사냥감, 먹잇감과 공존하기 때문에 서식환경을 무시할 수 없다. 장림(長林) 즉 교목(喬木) 숲에서 서식하기 때문에 과거 울산지역 산림의 형태도 상상할 수 있다.

범은 사납고, 무서운 짐승이다. ‘타이거(Tiger)’는 잔인하고 흉악한 혹은 용맹한 사람으로 비유된다. 하지만 타이거의 어원은 고대 수메르어로 ‘화살’이라는 ‘티그리스(Tigris)’라고 전한다. 무늬가 있고 몸집이 큰 짐승이 화살처럼 날렵하다고 해서 붙여진 비유라는 설이다. 덧붙이면 영어 ‘트리거(trigger)’는 ‘유발하다’ ‘촉발’ ‘일으키다’ ‘계기’ ‘방아쇠’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방아쇠는 듣기만 해도 섬뜩하다. 타이거와 트리거를 겹쳐지게 해본다.

호랑이의 무늬는 고양잇과 동물의 보호색이라고 할 수 있다. 호랑지빠귀는 호피 무늬를 연상시켜 부르는 새 이름이다. 곶감, 마마, 호환, 불법 비디오 등을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으로 비유한 것은 호랑이보다 더 심한 피해를 두드러지게 한 표현이다. 현재는 중학교 2학년 사춘기 시기가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고 하지만….

축원문에 나오는 ‘호랑액사(虎狼厄死)’는 실질적인 표현이다. 호랑이를 잡는 포수 중의 포수 즉 ‘도포수(都砲手)’를 일컫는 말이다. 범이 시대적으로 포수의 사냥감이 된 것은 호피(虎皮)와 호아(虎牙), 호골(虎骨) 때문이었다. 호피는 시집 보내는 가마에 덮었고, 호아는 목걸이 장엄으로 용맹스러운 기운과 날카로운 이빨을 부각해 삿된 기운을 쫓는 주술적 도구로 활용했으며, 호랑이 뼈는 약으로 사용했다. 또한, 범을 탄 호위무사는 상여에 장식되어 방상씨적 역할을 대신했다.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란 제목은 〈수궁가〉를 바탕으로 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결과일 것이다. 박헌봉의 《창악대강·1966》 ‘모족(毛族) 모임’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호랑이가 나온다. 주홍 입 쩍 벌리고, 두 귀는 찢어진대. 기둥 같은 앞다리며, 전통 같은 뒷다리로 징긍징긍 걸어 나와 누에머리 흔들면서 얼룽덜룽 긴 꼬리를 한번 획 부딪치더니 좌중으로 들어앉으며, 나는 이 산중에 산군이라 주인으로 한가운데 수석하고…….”

범은 대표적인 벽사수(闢邪獸)이지만 제일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게으름이다. 사람이나 가축이 범에게 당하는 화(禍)인 호환(虎患)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 내려온다.

하루는 범이 배가 고파 마을로 내려왔다. 한 집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가족과 가축들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야위었는데 주인은 지나치게 살이 쪘다. 또 한집을 들어가 보니 주인만 야위었고 가족과 가축들은 건강했다. 돌아 나오는 길에 불 켜진 창가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마침 이웃집 살찐 주인과 야윈 주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범은 그날 밤 살찐 주인을 산으로 데려갔다.

이야기는 게으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이다.

범은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 동물이다. 첫닭 울음소리는 범을 산으로 몰아내며 어머니를 잠 깨운다. 어머니는 정월의 찬바람을 맞으며 남편과 자식 그리고 가축을 살찌운다. ‘곶감 줄게,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와 같은 말의 공통점은 ‘먹는 것’이다. 어머니의 야윈 손가락 마디마디는 범이 가장 무서워하는 부지런함이 박힌 옹이이다. 밤마다 범이 내려오는 이유는 게으른 자를 찾아 잘못을 깨우쳐 뉘우치도록 징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 조류생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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