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푸라기’ 없는 새해를 시작합니다!
‘보푸라기’ 없는 새해를 시작합니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01.02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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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주일날, 기온이 갑자기 영하권으로 떨어졌다. 전날에 비해 10도 이상 기온이 내려간 것이다. 아침부터 아내가 부산하다. 평소엔 새벽미사를 드리고 난 후 함께 걷기운동을 나간다. 그런데 혼자 다녀오란다. 무슨 일일까? 계절이 바뀌면 아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제철에 맞는 옷을 꺼내 하나하나 입어 보며 옮기기 시작한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진 날씨에 맞춰 두터운 옷을 챙겨 입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 옷 저 옷을 꺼내 입어 보는 일은 기분을 묘하게 만든다. 마치 모델이 된 듯, 자신도 모르게 거울 앞에서 이런저런 포즈를 취해 본다. 그러다 보면 어린애처럼 마음이 들뜨기 마련이다.

오랜만에 입어 보는 옷 중에 가장 즐겨 입던 카디건이 눈에 들어왔다. 얼른 입고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돌아보는데 오른쪽 소매 아래에 눈길이 머문다. 낡은 옷이 아닌데도 보푸라기가 잔뜩 일어 옷이 매우 허름해 보인다. 안타까워하는 나를 보고 아내가 “걱정말라”며 작은 도구를 하나 꺼내 왔다. 아내는 순식간에 옷의 보푸라기들을 깔끔하게 제거했고, 카디건은 감쪽같이 다시 새 옷으로 복원됐다. 보푸라기는 어떤 것과 마찰을 일으킬 때 생긴다. 카디건에 생긴 보푸라기는 내가 그만큼 이 옷을 자주 입고 많이 움직이며 활동했다는 걸 보여준다. 옷장 안에 고이 간직된 옷에서는 결코 보푸라기가 저절로 일지 않는다.

‘인생’이라는 옷에도 보푸라기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인생의 보푸라기는 어쩌면 내가 하루하루 바쁘게 그리고 열심히 살아 움직였다는 증표인지도 모른다. 복잡한 인간관계 안에서 사람들과 정신없이 부대끼다 보면 애증의 실밥들이 꼬여서 점점 거추장스러운 보푸라기로 변한다. 보푸라기를 달곤 마음이 불편해서 그냥 다닐 수가 없다. 그러면 내 인생의 보푸라기는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까? 제대로 된 옷을 입기 위해 보푸라기 제거기가 필요하듯, 우리 삶도 흐트러지지 않고 온전하게 살아가려면 그런 역할을 해 주는 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종교를 가진 이에겐 그들이 믿고 의지하는 신(神)이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서로가 꼭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분이다. 일반인에겐 멘토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 멘토는 우리의 삶을 통째로 재단하는 분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불필요한 보푸라기들을 삶에서 떼어내 주는 분이다. 새 옷을 입기 위해서가 아니라, 입고 있는 옷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다. 누구에게나 멘토가 필요한 이유다. 멘토와 함께 매일 새벽마다 새롭게 깨어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들어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최근 읽은 글이다. 가슴이 먹먹했다. 구순을 넘긴 이생진 시인은 우리네 삶을 이렇게 정리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이라고. 그리고 자책하는 목소리에 담아 우리를 나무란다. “거창하게 인생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며 마치 삶의 본질이 거기에 있기나 한 것처럼 핏대를 올리는 당신들은 얼마나 어리석냐?”고. 진리와 행복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데.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라고 후회한다.

내 몸의 주인인 기억이 하나둘 빠져나가 마침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나이가 찾아온다. 창문을 열러 갔다가 그새 거기 간 목적을 잊어버리고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무엇을 꺼내려고 냉장고에 갔다가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채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 상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하고 울컥하게 만든다. 하지만 누구나 그럴 순간이 곧 다가온다. 피할 수 없는 내 삶이다. 나의 소명(召命)이다. 그때가 올지언정, 새해엔 온몸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매 순간을 기쁘게 살아가게 지켜주소서!

이동구 본보 독자위원장·RUPI사업단장·한국화학연구원 전문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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