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기리 알바위’
‘방기리 알바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08.08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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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도 햇볕이 뜨거웠다, 참가자들의 열의도 햇볕만큼이나 뜨거웠다. 8월 6일 점심나절, 일행은 끼니 생각도 접어둔 채 현장답사에 여념이 없었다. 울산시의회 의원연구단체 ‘문화수도 울산! 콘텐츠 정책연구회’가 처음 마련한 현장답사 대상은 ‘방기리 알바위’였다.

참가자 수는 스무 명 남짓. 연구회 소속 이미영 회장과 박병석(현 의장)·이시우(현 산건위원장) 회원이 앞장을 섰고, 정책자문위원인 김언배 울산대 교수와 김성수 철새홍보관장이 보조를 같이 맞췄다. ‘神市本土記(신시본토기)’의 저자 장동균 선생과 최승훈 전 울산시 문화특보. 김진규 전 남구청장은 이날의 자천타천 초대손님. 방기리 알바위를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정상태 전 울산MBC 피디는 자료(논문 ‘동뫼에 대한 고찰’)제공과 특별해설을 도맡았다.

일행은 현장답사에 앞서 ‘알바위 문화’에 관심이 깊은 통도사 방장 성파 스님을 토굴로 찾아뵙고 예비지식 강의를 귀담아들었다. 성파 스님은 방기리 알바위 유적이 ‘선사시대에 3단으로 쌓아 올린 제단(祭壇)’이란 지론을 폈다. 또 이 알바위가 통도사 산문(山門) 근처 ‘땅바위’와 쌍(雙)을 이루는 ‘짝’이라는 주장도 같이 폈다. 방기리 알바위가 남성성을 상징한다면 산문 앞 땅바위는 여성성을 드러낸다는 것. 스님의 말씀을 좇아 일행은 답사 대상에 ‘땅바위’를 추가하기로 했다.

방기리 알바위 답사길에 일행을 먼저 맞이한 것은 길을 가로막은 한 주민 할머니의 하소연이었다. 문화재 구역으로 묶어두는 바람에 재산권 행사의 길이 막혀 억울하기 짝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 민원은 이미영 회장과 김성수 관장이 차례로 접수했고, 할머니는 그제야 응어리가 풀린다는 표정이었다. 1992년 9월 암각화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에서 발견된 울주군 삼남면 방기리의 알바위는 1994년 7월 경남도 기념물(지방문화재) 제137호로 지정됐다가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된 1997년 10월 ‘울산시 기념물 제10호’로 명패를 갈아 달았다.

울산MBC 기획 ‘선사인의 예술 암각화’ 제작을 이끌었던 정상태 선생은 ‘방기리 알바위’를 ‘동뫼’라고 부르며 해설을 이어갔다. 방기리 밭 가운데 솟은 작은 봉우리 ‘동뫼’의 명칭 유래에 대해 그는 4가지 설(說)을 열거했다. △‘동네 가운데 산’이란 뜻의 동뫼(洞山) △‘마을 동쪽의 산’이란 뜻의 동뫼(東山) △‘동쪽에 세운 무덤 봉우리’란 뜻의 동뫼를 소개한 다음 △‘동쪽의 제사 올리는 봉우리’라는 뜻의 동묘(東廟)로 불리다가 동뫼로 변했다는 설을 하나 더 곁들인 것. 그러면서 자신은 ‘동묘(東廟)→동뫼’ 설이 가장 합당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정 선생은 동뫼의 구조가 ‘한반도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선사시대의 독특한 구조물’이라고 추정했다. 암석이 뒹구는 자연 동산처럼 보이는 현재의 모습이 실은 지진으로 허물어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 근거로 그는 방기리 알바위가 양산단층대의 중간지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는 또 알바위를 천신(天神)에게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던 성소(聖所) 즉 제사유적으로 보면서, 축조 시기를 집단주거 형태가 나타난 청동기시대로 추정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장동균 선생이 십자형(X자형) 암각 무늬가 새겨진 네모난 바위와 그 바로 옆의 둥근 바위를 사람 모양 비석이 자연재해로 쓰러졌을 것으로 해석했다는 점이다. 답사팀 일행은 방기리 알바위 일대에 대한 울산시 차원의 시·발굴조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미영 회장은 이 일대 사유지(私有地)를 시유지(市有地)로 흡수하는 방안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말로 식전(食前) 답사의 마침표를 찍었다. 여운이 오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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