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 집짓기 어렵다’
‘길가 집짓기 어렵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2.09 19: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장(家長)이 갑자기 목돈이 필요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아버지는 몇 날을 고민했다. 결국 사흘 앞으로 다가온 장날에 나귀를 팔아야겠다고 작정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30리길 장터를 향해 일찍 길을 나섰다. 아버지는 뒤따르는 나귀보다 목돈 걱정에 몸과 마음이 피곤했다. 아들이 아버지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말했다. “아버지, 나귀 타고 가시죠.” 아버지는 아들이 하자는 대로 몸과 마음을 맡겼다. 살다가 처음이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고, 아들은 나귀 고삐를 잡고 묵묵히 걸음을 재촉하며 장터로 향했다.

이윽고 빨래터를 지나가게 됐다. 아낙네들이 주고받는 수군거림을 아버지가 들었다. “아니, 왜 아버지는 나귀를 타고 아들은 걸어가는 거지? 아버지가 참 인정머리 없군.”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아들을 나귀에 태우고, 자신이 고삐를 잡았다. 노인들이 쉬고 있는 정자 앞을 지나게 됐다. “왜 아버지는 힘들게 걸어가는데 아들은 편하게 나귀를 타고 가지? 아들이 참 버릇없군.” 노인들이 아들을 꾸짖듯 말했다. 할 수 없이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나귀를 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농부를 만났다. “아니, 이런 나쁜 사람들이 있나. 작은 몸집의 나귀 등에 두 사람이 타면 나귀가 얼마나 힘들겠어?” 그 말을 들은 아버지와 아들은 나귀 등에서 내려 함께 걸어갔다.

그렇게 얼마쯤 가다가 어떤 할아버지를 만났다. “참 이상한 사람들이군! 나귀가 있는데도 타지 않다니. 나귀가 그렇게 불쌍하면 차라리 메고 가지!” 그 말을 들은 아버지와 아들은 나귀의 다리를 묶고 긴 장대에 끼워 어깨에 메고 갔다. 두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며 비틀거렸다. 얼마 후 다리를 건널 때 나귀가 발버둥을 치자 장대가 뚝 부러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나귀는 다리 밑 개울로 풍덩 빠져버렸다. 이솝 우화(寓話)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나귀’ 이야기다.

우화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자신의 계획대로 나귀를 장터에 팔지도 못하고 물에 빠뜨려버리게 된다. 이 교훈적 이야기는 명확하다. 자신에게 중요한 문제나 일이 발생했을 때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남의 말만 듣는 사람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속담에 ‘길가에 집 못 짓는다’는 말이 있다. 길가에 집을 짓다보면 오가는 사람마다 겨울염소같이 입을 댄다. 모두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겠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겨울부채같이 도움이 못된다.

이러한 경우는 숱하다. 새 옷을 입고 친구를 만날 때도 그렇다. ‘잘 어울린다’, ‘당장 벗어 버리라’, ‘그것도 옷이라고 샀느냐’는 둥 말이 많다. 옷 사는 데 돈 보태 준 것도 아닌데 입에 게(蟹)거품을 내면서까지 나무란다. 그러다가 술·밥이라도 얻어먹으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입에 발린 소리가 이어진다.

이러한 경우 비슷한 표현이 또 있다. ‘길가 집짓기 삼년이라도 완성되지 않는다’는 속담이다. 이를 점잖게 진서(眞書)로 표현하면 ‘작사도방삼년불성(作舍道傍三年不成)’이다. 필자의 토굴도 길가이다 보니 집 지을 때도 입 대는 사람이 많았다. 현재도 오가는 사람들이 던지는 말과 던지는 음료수병, 휴지, 꽁초 따위가 이따금 마당에 굴러다닌다.

울산에 칠십 중반을 넘긴 원로서예가 우보 배성근 선생이 계신다. 소걸음처럼 우직하게 서예의 길만 걷는다 해서 호(號)가 우보(牛步)다. 지난달 29일부터 2월 3일까지 울산문화예술회관 1전시장에서 ‘배성근 서예전’이 열렸다. 선생은 2년에 한 번씩 서예전을 열어 올해가 열 번째다. 우보 선생은 예향, 묵향의 도시로 이름난 전주 출신이다. 1984년 울산에 정착했다. 텃새 호사가들은 굴러온 돌, 날아온 철새라고 말했겠으나 그동안 소걸음의 세월은 어느덧 올해 36년째에 접어들어 박힌 돌, 텃새로 자리 잡았다.

필자가 서예전을 찾았다. 우보 선생은 전통과 현대, 글과 그림, 서예와 설치 등 매회 다른 주제와 작품으로 시민들과 만난다. 이번 서예전도 ‘고전(古典)을 거부하지 않고, 시대(時代)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평소의 지론대로 설치미술로 전시장을 구성했다. 이번 서예전의 대표작은 ‘반구대에 있는 집청정’이었다. 운암(運庵) 최신기(崔信基)의 <집청정 시집>을 기초로 한자와 한글로 완성했다.

매회 독특한 모양새로 시선을 끈 우보 선생의 전시연출은 이번 서예전에서도 계속됐다. 천장에서 길게 늘어뜨려 바닥까지 닿게 한 주련 같은 시각작품 설치는 판소리로 치면 단연 절창(絶唱)이었다. 내용도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것), 견재상생지족’(見在常生知足=현재는 늘 이만하면 족하다고 마음먹는 것), 해현갱장(解弦更張=느슨해진 거문고 줄을 다시 팽팽하게 조여 매는 것) 등 다양했다. 특히 개판오분전(開板五分前)은, 순간적으로 읽으면 파격적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겠지만, 그 속에 담긴 본래의 의미는 시대를 거슬러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문구였다.

작품 속에는 영어, 한글, 한자 등 원문과 해석이 함께 들어가 보고 읽는 이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배려했다. 특히 눈에 띈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작사도방삼년불성(作舍道傍三年不成=길가 집짓기 어렵다)’였다. 각자 자기 전문성을 심화시켰으면 한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조류생태학 박사/철새홍보관장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