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의 가을
대관령의 가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0.31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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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의 존재를 믿은 적이 없는 사람인데, 이 곳 숲에 들어오면서 신의 존재를 느꼈어.”

신이 없다면 어느 누군가가 이토록 경이로운 숲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라는 마음으로 대관령 숲에 첫 발을 들였을 때 그녀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직 햇살이 닿지 않은 이른 아침, 몇 해를 지나며 떨어졌을 낙엽들이 켜켜이 이슬에 젖어 그지없이 부드럽다. 그 땅 위로, 길게 솟은 나무에 매달린 가지들은 붉고 붉은 춤이 애ˆ㉣ ‘애달프다’라는 말은 빛을 받고 화려하게 치장한 무희의 춤에 대한 형용사로는 어울리지 않지만, 한 때의 우리이기도 하고, 지금의 우리이기도 해서 나는 애달프다.

대관령 산꼭대기에서 선자령 넘어가는 깊은 골에 위치한 성황사로 들어서자 그 붉은 기운에 압도되어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겨울이 길고 깊은 대관령 시월의 끝자락이지만 연일 봄날처럼 포근한 가을이 아직은 한참 남았을 거라는 느슨한 생각에 신은 여지없이 나의 몽환을 깨운다, 며칠 사이 깊고 짙어진 추색은 눈으로 담기에도 너무나 찬란했다.

신령스런 기운에 조심스레 발자국을 떼보는데, 이방인이 들어서자 까마귀 몇 마리들이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부산스럽다. 그들만의 언어로 짧게 혹은 길게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어떻게 왔느냐고 내게 묻은 말 같기도 하고, 저 사람은 어떤 기도를 안고 왔을까, 그들끼리 맞춰보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꼭 그럴 때 누군가에게 들킨 듯, 살면서 지은 죄는 왜 머리를 스치는 것인지.

대관령 국사 성황당이라고도 하는 성황사는, 서낭의 심부름을 하는 돌로 쌓여진 수비당 앞 5평 남짓 기와가 얹어진 서낭당과 대관령 산신을 모신 산신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통의 큰 사당이 아닌 자그마한 기운에서 뿜어 나오는 아우라가 비범하다. 그 지방의 많은 자연재해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주고 가까운 바다의 풍어를 가져다주는 영험한 신을 모신 사당으로 알려져 있다.

매년 이곳에서 산신제가 열리는데 제를 마친 서낭신목은 단오 전날 또다시 강릉 남대천(南大川)에서 5일간 제를 올리고 마지막 날 여기에 불을 붙이고 절을 하며 서낭께 작별을 고한다고 한다. 그 축제가 중요무형문화재인 강릉단오제이다. 기회가 된다는 이곳 대관령 성황사의 산신제는 꼭 보러와야겠단 마음으로 잠시 머무는 아쉬움을 달랬다. 텃새가 된 까마귀들이 떠날 때까지 빈손으로 가는 나를 보며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사진만 덜렁 몇 컷 찍고 오기엔 미안한 마음에 머리꼭지를 쪼일 것 같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본다.

강원도 평창 대관령에는 수년간 그곳의 숲에 살면서 자연의 내밀한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나눠주는 흠모의 벗, 그녀가 살고 있다. 전생에 닦아놓았던 서로에게 가는 길이 있어, 느렸지만 늦지는 않게 여러 마음과 시간이 맞는 이번 가을에 함께 산책할 수 있는 시간을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지새우고 느긋하게 일어나 커피 한 잔으로 목을 축인 후 걷는 아침산책 시간이 길어진다. 더 느릿느릿 걸으면 시간이 영원으로 이어질까.

외부와의 소통을 뒤로 미루고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은밀한 고립의 휴식. 다른 고장으로 일이나 유람하는 것이 사전적인 여행이라면 산책은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 천천히 걷는 일’이라고 되어있다. 우린 느리게 걸었고 서로에게 기대 쉬었으니 산책이 분명 맞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녀온 후 며칠은 살아있는 성자처럼 다가온 그녀의 존재만큼이나 가을이 나의 숲에도 깊숙이 파고들었다. 갈 곳 몰라 정처 없는 마음도 외면해오던 곳으로 눈을 돌리고, 괜시리 살며 쫓기던 일들도 길지만 단정하게 한 줄로 세워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화와 위안, 돌아오고 나서 그녀가 찍어 보내준 수십 장의 사진을 보며 한참을 다시 그리워했다. 누군가의 시선에 오롯이 겨운 온통 나의 모습뿐이었다. 그 애정 어린 마음을 다시 나눌 곳, 주위를 둘러보라 그녀가 내게 말하는 듯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숲은 내게 늘 혼자였다. 혼자 걷고 혼자 돌아오며, 혼자 머물던 숲, 혼자 결정하고 혼자 할 수 있고, 혼자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신 앞에서 살아가는 먼지 한 톨의 인간으로 때론 오만인지도 모르겠다. 함께 걷는 숲, 함께 호흡하는 숲, 함께 쉬는 숲. 대관령 숲 신의 영험한 기운과 그녀의 힘이 보태져서 쓸쓸하기 그지없는 이 가을에 나는 씩씩하고 다정해지고 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 때면 영락없이 마비되는 손가락 귀신도 물리치고 먼저 가을 안부를 나누곤 하는 경이로운 가을이라니.

최영실 여행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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