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 발은 네 발이요, 사랑 발은 두 발이라’
‘가마 발은 네 발이요, 사랑 발은 두 발이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0.27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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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회 처용문화제’가 지난 18~20일 남구 달동문화공원에서 열렸다. 행사의 주제는 ‘처용, 울산을 품다’였다. 1967년 ‘울산공업축제’로 시작해 울산의 대표축제로 명맥을 이어온 ‘처용문화제’는 해를 거듭하며 다양한 형태로 변모해 왔다. 그러나 올해도 진정한 ‘처용’을 의미하고 있는지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또한 축제장에 수없이 늘어선 플리마켓과 푸드트럭들이 과연 ‘처용’과 어떤 연결성을 갖고 자리한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플리마켓은 지난달 열린 ‘프롬나드페스티벌’에서도 볼 수 있었던 똑같은 업체들이 대거 참여해 타 축제와의 차별성을 두지 못했다는 인상을 남겼다. 50여년을 지켜온 ‘처용문화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선 현 시대에서 바라보는 ‘처용’의 모습을 어떻게 축제 속에 녹여낼 것인지 더욱 깊이 있는 고민을 해봐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처용문화제’가 ‘처용’이란 이름에 갇혀 관련 콘텐츠들을 단순히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대가 진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처용 이야기를 전하는 울산 대표축제로 거듭날 수 있길 바란다.” “처용문화제, 정체성 확립해야” (강현주 글 인용)

처용문화제가 올해도 이 같은 지적을 받고 막을 내렸다. 지적이 매년 반복되는 것은 처용설화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바탕 위에 처용문화제란 건축물을 세웠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논쟁이 반복되는 이유는 《삼국유사》<기이편>의 처용설화를 ‘설화’로 읽지 않고 ‘사실’로 읽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처용은 누구인가?’라는 어리석은 질문이 매년 반복되는 질문으로 굳어졌다. 결국 호족, 아라비아인 등 두 가지 결론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부터 ‘처용은 어떤 의미인가?’라고 질문해야 한다. 설화가 생성된 신라시대와 현실에서도 같은 질문이어야 한다.

처용설화는 ‘역병 퇴치’에 방점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처용 아내와 역신의 억지통정’으로 접근하는 바람에 방점을 잃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방점이 ‘처용’에 있으면 ‘용이 사람 된 현상’, ‘전염병을 치료한 사람’, ‘고백을 들은 사람’, ‘벽사 신’ 등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년에도 같은 지적이 반복되지 않도록 몇 가지 조언을 나열한다.

첫째, ‘범(犯)’에 대한 해석의 잘못이다. 영공 침범, 사생활 침범 등의 용례에서 느낄 수 있듯이 처용의 경계를 역신이 주제넘게 범했다. 이 문장을 구태여 ‘화간(和姦)했다’고 억지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동침은 ‘같은 방에서 잤다’는 의미이지만 현재까지 모두의 주장은 ‘역신과 처용 아내의 간음 현장’으로 파고들어 해석되었고, 이것이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그 결과 처용문화와 처용문화제의 다양성과 풍부함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문제의 문장은 역신이 ‘사람으로 변하여 밤을 기다려 몰래 함께 잤다(變爲人 夜至其家 竊與之宿)’는 것이 바른 풀이다. 설화로 읽고 해석해야 된다. ‘처용이시여! 삿된 역신인 제가 감희 성결(聖潔)의 성소(聖所)인 처용방 성경(聖境)을 몰래 범했습니다.’ 역신이 처용 앞에 무릎 꿇고 고백한 말에서도 확인된다.

둘째, ‘다리’란 표현의 해석이다. 고금(古今)에서 다리를 성(性)과 연결시켜 은유적(隱喩的)으로 풀이하여 삶에 여유를 불어넣는가 하면 억지로 이치에 닿지 않는 천착으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올무 같은 처지도 있다. 처용설화의 해석이 그러하다.

‘베틀 발은 네 발이요 사랑 발은 두 발이라∼ 가매 발도 네 발이요 사랑 발은 두 발이라.’ <베틀가> 가사의 베틀 발과 가마 발은 그저 보이는 현상의 네 발이다. 그러나 사랑 발은 네 발이 아닌 두 발로 표현되고 있다. 처용가의 ‘네 발’은 베틀가와 비교하면 결코 ‘사랑 발’이 아닌 그저 ‘나란히 누웠다’는 뜻임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용서와 화해’란 잘못된 해석이다. “이때 역신이 본모습을 나타내 처용 앞에 꿇고 말하기를, 제가 공의 부인을 부러워하여 지금 그를 범하였습니다.(時神現形 ?於前曰 吾羨公之妻 今犯之矣)”라는 문장에서 ‘역신이 처용 앞에 꿇고 말하기를’이란 표현은 역신이 잘못을 뉘우치고 한 회개의 고백이다. ‘처용과 역신 사이의 용서와 화해’라는 읽기는 도대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화해는 동급일 때 가능하다. 오히려 학문이라는 미명아래 쉬운 것을 어렵게, 간단한 것을 복잡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처용설화에서 용서와 화해라는 잘못된 표현은 사족(蛇足)이다. ‘범(犯)’이란 ‘침범(侵犯)’에서 ‘침’이 생략된 낱말이다.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숙(宿=머무르다)’과 ‘범(犯=침범하다. 어기다)’을 두고 한 방에서 나란히 잠을 잔 ‘동침(同寢)’으로 풀이하는 것은 무리다. ‘간음(姦淫)’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처용문화제의 확대와 발전을 저해하는 적폐청산의 대상일 뿐이다. 더 이상 비생산적인 논쟁을 멈춰야 한다.

향후 처용문화제는 ‘용이 사람이 된 현상’, ‘전염병을 치료한 사람’, ‘고백을 들은 사람’, ‘벽사 신’ 등으로 해석하여 ‘치유 문화제’, 잘못을 고백하는 ‘고백(告白) 문화제’, 삿된 것을 물리치는 ‘벽사 문화제’ 등의 정체성에 기초해서 현실적으로 접근할 것을 제언한다.

김성수 조류생태학박사/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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