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추억
고통의 추억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10.10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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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울산을 떠나 서울에서 둥지를 튼 지도 30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으니 ‘세상은 또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어 왔을까’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나는 그 많은 변화 중에서도 특히 교통수단의 획기적 변화를 가장 먼저 거론하고 싶다.

1962년 울산이 공업지구로 설정된 뒤 공업화의 물결이 서서히 일기 시작할 무렵, 서울과 울산을 잇는 대중 교통수단은 중앙선 열차였다.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이므로 서울을 가려면 저녁 7시쯤 울산역에서 중앙선 완행열차에 몸을 실어야 했다. 약 10시간쯤의 고행(?)을 각오한 채 불편한 수면과의 씨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종착역인 청량리역은 늘 싸늘한 새벽공기로 여행객들을 맞이하곤 했다. 피할 수 없는 고된 나들이였다. 따라서 이러한 와중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울산 시민들에게 엄청난 기쁨으로 다가왔다. 오랜 가뭄 끝에 찾아온 시원한 빗줄기나 다름없었다. 불과 5시간 만에 서울 땅을 밟을 수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통 혁명(?)이 일어나기까지에는 극복해야만 할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1964년 독일(당시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을 달리며 큰 충격에 휩싸였다. 6·25 전쟁을 거치며 파괴된 국토의 동맥을 되살리고, 경제부흥을 위해 그가 구상해 온 것이 고속도로였기 때문이다. 귀국 뒤 박 대통령은 손수 도로망을 그려 가며 연구에 몰두했다. 그리고 대선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내걸었다. 그러나 ‘부유층 유람로를 만들려 하느냐’ ‘국가 재정을 파탄 내려 하느냐’는 반대 여론이 야당 등에서 들끓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1970년 7월 7일 대구. 박 대통령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축사를 이어갔다.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이 개통된 것이다. 계획보다 1년 앞당겨진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였다. 박 대통령은 샴페인을 도로에 뿌리며, ‘가장 싼 값(1km당 약 1억원)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거대한 예술작품’이라며 감회에 젖었다.

그렇게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전국이 ‘1일 생활권’에 접어든 뒤 본격적인 마이카 시대가 열렸다. 부유층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자가용 승용차를 일반 국민들도 앞다투어 소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7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늘어난 차량으로 고속도로는 주말이나 명절이면 극심한 교통체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엔 열차표 구하기가 무척 힘들었으므로 주로 고속버스를 이용했는데 장시간 기다려 표를 구하는 과정부터가 그리 수월치 않았다. 초가을 따가운 햇살 아래 장시간 쭈그리고 앉아 차례를 기다리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오랜 기다림. 그리고 드디어 차례가 돌아와 귀성 티켓을 거머쥐었을 때의 기분은 하늘을 날아갈 듯 기뻤다.

그러나, 그 쾌감도 머지않아 닥치는 귀성길에서의 교통체증으로 금세 달아나고 말았다. 요즘은 버스전용차로제 실시로 사정이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으나 그 당시만 해도 교통체증은 몸서리칠 정도였다. 울산까지의 소요시간이 10시간 이상은 기본이었고 어떤 때는 22시간이나 걸린 적도 있었으니 이른바 교통이 아닌 ‘고통’이었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값비싼 항공편을 제외하고, 대중교통편은 늘 불만족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2010년 말, 엄청난 충격의 교통 혁명(?)이 일어났다. KTX 울산역이 신설된 것이다. 나의 표현이 다소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제 불편했던 교통상황을 몸소 겪어 보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동안 ‘중앙선 완행열차’에서 ‘KTX’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의 인내가 요구되었다. 하지만 이미 내 고향이 더욱 더 가깝게 다가와 있다는 가슴 벅찬 희열 앞에서, 나는 가끔 특별한 행복감에 젖어들곤 한다.

김부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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