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우 선생을 추모하며
이일우 선생을 추모하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9.04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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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진하는 조국의 비약을 상징할/ 건설의 도시여 우리의 울산/ 동해의 물과 같이 뜨는 해 같이/ 발랄한 기상으로 새아침을 노래하자/ 기름 부어 축복된 우리 고장을/ 한마음 한뜻으로 지켜 가꾸자’(울산의 노래)

1970년대. 울산공업축제의 서막을 알리던 울산공설운동장. 울산정유공장과 한국비료, 동양나일론, 삼양사 등 각 기업의 기수단과 각급 학교의 기수들이 근로자들과 학생대표들을 이끌고 들어와 본부석 앞에 나란히 정렬한다. 국민의례에 이어 울산시장이 우렁찬 목소리로 축제 개막선언을 하면 축하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대단원의 막이 오른다.

이어서 예비군 군악대가 맛깔난 전주를 뿜어대면 학생과 시민들이 흥겹게 합창하던 노래가 있었는데 그 곡이 바로 ‘울산의 노래(박목월 작사, 박시춘 작곡)’다. 지금도 고향 울산의 시민들 중에는 더러 기억하는 분들이 계시리라. 그 예비군 군악대의 선두에서 눈이 부시게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지휘봉을 잡고, 맵시 있는 몸놀림으로 악대를 지휘하던 고(故) 이일우 선생. 그의 세련된 모습은 아직도 내 기억 저편의 아련한 흑백 필름 한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2000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향토사학자로서의 외길을 살다 가신 선친(琴谷 金錫保)의 추모비 제막일이기도 했다. 울산시 동구 주전동 신리마을. 성변산 선친 묘소 입구에 울산향토문화연구회 회원들과 행사 관계자들이 모였다. 선친은 고향인 울산의 문화유적을 발굴, 연구하고 보존하자는 취지로 뜻을 같이 하는 몇몇 분과 함께 1979년 울산향토문화연구회를 창립했다. 그 뒤 오랜 세월 이끌어 왔던 공로를 기리기 위해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추진한 추모비 건립이 그 빛을 발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그 제막식에서 뜻밖에도 이일우 선생을 만난 것이다.

필자가 80년대 초 상경한 뒤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으니, 무려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였다. 너무 반갑고 기쁜 마음에 그를 꼬옥 부둥켜안고서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는 폐암 투병의 아픔을 감춘 채 고인과의 끈끈했던 우정을 되새기려는 듯 자신이 분신처럼 아끼는 트럼펫을 들고 추모비 제막식에 기꺼이 참석했던 것이다.

식이 시작되고 고인에 대한 묵념이 이어지자, 그는 핏기 없는 얼굴로 앙상한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며 단아한 음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구슬픈 트럼펫 소리가 인접한 가을바다의 해풍에 실려 안개처럼 흩어져 갔다. 그의 두 눈에 회상의 눈물이 맺혔으리라. 선친과 의형제를 맺은 뒤 의기투합하며, 삭막했던 울산의 문화예술 환경을 개선하고 발전시켜 보고자 발 벗고 나섰던 세월의 파편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으리라.

이일우 선생은 트럼펫 연주자로, 초창기 UBC(울산문화방송)의 초대 악단장을 지냈다. 그분은 한국연예협회울산지부장도 지내며 ‘와이즈멘가’ ‘사랑은 장난인가요’ ‘당신은 사랑인가요’ ‘함월산 진달래’ 등의 가요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때 울산문화원 이사였던 선친과 이일우 선생은 한국연예협회 울산지부의 업무를 분담, 문화예술 향기에 목말라 하던 울산에 청량제 같은 역할을 해 보겠노라 발벗고 나섰던 것이다.

울산은 그 무렵, 공업도시로 선포된 뒤 공단으로서는 비약적인 발전을 보인 반면, 문화예술분야는 척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그토록 열악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문화예술 진흥에 작은 밀알이 되고자 헌신한 분들이 있었으니, 이일우 선생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제 선친께서 하늘나라로 가신 지도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강물처럼 흘렀다. 해를 거듭할수록, 애향심을 불태우며 울산을 사랑한 분들이 세상을 뜨셨다는 소식을 종종 접하게 된다. 세월의 큰 흐름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음에 안타까운 마음 늘 가눌 길 없다. 공업화의 거센 물결에 밀려 잃게 될지도 모를 역사적 진실,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애써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 울산의 여러 어른들께 다시 한 번 엎드려 큰절을 올린다.

김부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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