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얼룩진 과찬(過讚)’
다시 쓰는 ‘얼룩진 과찬(過讚)’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12.01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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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12월, 필자는 본보에 ‘얼룩진 과찬(過讚)’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한 바 있다. 이른바 ‘박근혜 정권’ 초기, 국내 정상급 문예지 ‘현대문학’을 둘러싼 불미스러운 일을 다룬 것으로 지금도 그 상황이 필자의 머릿속에 뚜렷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현대문학’ 측이, 원로 작가 이제하 씨가 2014년 1월호부터 연재하기로 예정돼 있던 장편소설 ‘일어나라, 삼손’의 연재를 거부한 것으로 출발했다. 이 씨는 페이스북에, ‘현대문학’이 자신의 소설을 거부한 이유를, 소설 배경에서 ‘박정희 유신’과 ‘87년 6월 항쟁’ 등을 언급한 게 문제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또 소설가 서정인, 정찬 씨 등의 작품도 비슷한 이유로 연재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발한 젊은 작가 74명이 집단으로 성명을 내고 ‘현대문학’에 기고를 거부하겠다는 뜻을 밝혀 그 파장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그 사태로 ‘현대문학’의 대표이자 편집주간인 양숙진 씨가 주간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4명의 편집위원도 사퇴했다. 그에 앞서 그해 현대문학상 수상자인 황정은(소설) 씨와 신형철(문학평론) 씨가 수상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들은 “현대문학이 공신력을 회복하는 데 기여하는 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상을 반납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다급해진 ‘현대문학’ 측의 사과문 발표 뒤 사태는 수습되는 듯했지만 유신시대를 언급, 묘사한 연재소설의 게재를 거부한 그 후유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데 그처럼 사태가 악화되었던 더 근원적인 문제의 불씨는, 그해 9월호에 난데없이 실렸던 박근혜 대통령의 수필 4편으로 지목되었다. 이들 수필은 이태동 서강대 명예교수의 ‘바른 것이 지혜이다 - 박근혜 수필 세계’라는 에세이 비평과 함께 실렸다. 하지만, “그의 에세이 대부분은 우리들의 삶에 등불이 되는 아포리즘들이 가득한,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진주와도 같다”며 박근혜 대통령의 수필을 찬양(?)한 이 교수의 해당 글은 마침내 문단의 반발을 샀다.

이 교수는 수필에 대한 비평을 통해, 박 대통령의 수필이 “출간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크게 조명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한국 수필계가 세계문학 수준에서 에세이 문학 장르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박근혜의 수필은 우리 수필 문단에서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일상적인 생활 수필과는 전혀 다른 수신(修身)에 관한 에세이로서 모럴리스트인 몽테뉴와 베이컨 수필의 전통을 잇는다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2007년 한 일간지에 쓴 칼럼에서 피천득 선생의 수필을 평가절하하며 “과공(過恭)이 비례(非禮)인 것처럼, 과찬(過讚) 역시 비례”라고 일갈한 바 있다. 이 비평을 두고 문단에서는 이 교수가 박 대통령의 수필을, 그의 칼럼 속 한 구절처럼 “지나치게 과찬한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일었다.

그해 5월에는 한국시인협회가 전직 대통령과 재벌 총수들을 찬양하며 권력과 자본에 아첨하는 시들이 담긴 시집을 냈다가 전량 폐기하는 웃지 못 할 촌극을 빚기도 했다. 수록된 시 가운데에는 지금도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들의 공로를 지나치게 부각하거나 과오를 언급하지 않은 시들도 일부 포함돼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과찬의 그림자가 채 걷히기도 전인 그 시점에서 어설픈 사건을 잇따라 접했던 필자는 문인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오늘 이 시점에서 이 교수에게 다시 묻고 싶다. 현직 대통령의 수필을, 그것도 임기 초기에 찬양(?)하면 어떤 의미로 비쳐질지 한 번쯤은 헤아려 보았는지 말이다. 설령 티끌만큼의 아부성 의도는 없었다 하더라도 그쯤은 헤아릴 줄 아는 게 지식인의 올바른 자세가 아닌지 묻고 싶다. 그날의 사태를 참담한 심정으로 떠올리며, 우리 사회의 일부 몰지각한 지식층들의 곡학-아세(曲學阿世)에 뜨거운 경종도 울려주고 싶다.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국가의 품격’이 처참하게 훼손된 오늘, 과연 이 교수의 표현대로 박 대통령의 수필이 ‘일상적인 생활 수필과는 전혀 다른 수신(修身)’의 뛰어난 본보기였는지 거듭 묻고 싶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아니었던가?

<김부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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