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꽃핀 방어진회 ②
일본에서 꽃핀 방어진회 ②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2.11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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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진항구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어민들에 의해 조성되었고, 항구 주변에는 일본어민들이 몰려와서 이주어촌을 형성하고 살았지만, 지금의 울산사람들은 그 사실조차 잘 모른다. 조선조 말기로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울산의 동구(동면)는 1897년까지는 병마(兵馬)를 기르던 목장이었다.

방어진에 처음으로 일본인의 선박이 내항한 것도 이 시기였다. 일본의 오카야마 히나세촌의 사람들이 설치한 삼치류망이 조류에 떠내려가자 이것을 건져가기 위해 들어온 것이 내항의 시작이었다. 당시 방어진에는 30여 호(戶)의 반농반어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히나세마을지는 기록하고 있다.

또 당시는 어선과 그물이 모두 불안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룻밤에 삼치를 1천 마리나 잡아 망을 거두면 배가 가라앉고, 배를 가라앉히지 않으려면 망을 버려야 해서 어찌할 줄 몰라 곤란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남아있을 정도였다. 당시의 방어진은 요즈음 말로 ‘물 반, 고기 반’의 생태환경이 원시 그대로 유지되어 어족자원이 풍부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어기가 짧은데다 현해탄을 나뭇잎과 같은 어선으로 건너다니는 데에는 날씨의 정함을 기다려야 하고, 그래서 편도 1개월은 충분히 걸렸다. 때로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 배와 함께 사라지는 슬픈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1905년 히나세(日生) 어민 아리요시 카메키치(有吉龜吉)가 방어진에 내항했을 때 야마구치현민과 동경인 2인의 일본인을 보았다고 한다. 아리요시(有吉)는 어민으로 왔으나 어업에 종사하지 않고, 잡화점을 열었다고 한다.

1906년경에는 가가와현(香川縣)에서 4호(戶)의 이주자를 내었고, 이때부터 일본의 서부해안 어민들은 방어진 앞바다에서 본격적인 통어를 시작했다. 1908년 ‘한국어업법’의 제정으로 어장은 한?일 양국 사람들에게 널리 개방되었지만, 어업권의 허가는 한국 거주자로 제한했다. 이 때문에 일본어민의 이주가 촉발하게 되는데, 히나세 어민들은 처자를 불러들여 조선에 거주하는 자가 많아졌고, 방어진에는 일본인 촌락(日本人町)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방어진은 삼치유뢰망( ?流瀨網)의 근거지가 되었다.

1909년 봄에는 일인 호수가 98호, 그 중에 음식요리점이 73호, 추업부(醜業婦)가 260여명이란 기록이 남아있다. 이때부터 가가와, 오카야마, 야마구치 각 현의 삼치류망선 400 수십 척이 방어진항을 근거지로 어로작업을 했다. 방어진에서 굴지의 해양수산업체가 된 ‘하야시가네(林兼)’는 발동기 운반선으로, 그 외 오다조(小田組)·아리우오조(有魚組)·간사이조(關西組) 등은 기선 운반선으로 각각 선어 운반에 종사했다.

1910년경부터는 자신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 먼저 ‘순사주재소’를 설치하고, 일본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학교를 건립했으며, 일본인회·우편국·학교조합·공립심상소학교·위생조합·세관·울기등대·금융조합·재향군인회와 같은 공공기관도 차례로 들어섰다. 기업체로는 하야시가네(林兼)어업부·일본수산주식회사출장소·코오다(合田)어업부·방어진어업조합·방어진철공주식회사·하야시가네 통조림공장 및 정어리정유공장·미츠요시(三好)매실장아찌공장·가와구찌 회조점(回遭店:여객터미널)·사노키아(讚岐)회조점·전기회사·도키와(常般)영화관·목욕탕에 이어 점차 생활에 필요한 문화시설과 종교시설도 갖추어져 갔다.

특히 항내에는 선박의 접안시설이 문제였다. 이 때문에 1910년에 ‘작은 축항’이라고 부르던 ‘제1축항’을 축조했으나 너무나 작아서 고기를 잡아온 어선들을 제대로 수용해내지 못했다. 그래서 제2의 축항(방어진방파제 및 접안시설)을 건설하게 된다. 이때 방어진철공소가 있던 곳에 ‘뱃바위산’이라 부르던 바위산을 헐어다가 방어진방파제를 축조하고 나니 큰 공터가 생겼고, 거기에다 한국에서 최초로 철선을 건조하는 ‘방어진철공소(주)’를 세우게 된다. 방어진 사람들은 이것을 줄여서 ‘방철’이라고 불렀다.

우리 민족에게 광복, 해방은 일본인들에게는 패전(敗戰)을 의미한다.

그들은 패전이라고 하지 않고, 종전(終戰)이라고 말한다. 종전이 되자 한국에 살던 일본인들은 모두 떠나가야 했다. 한평생 일군 집과 사업장, 부동산 등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했다.

매물로 내놓아도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일본사람들 모두가 선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배를 얻어 타지 못한 사람들은 따로 한 곳에 모여서 기다려야 했다.

여러 척의 선박을 가진 선주들은 배를 배당받지 못한 일본인들을 위해 선장을 붙여 배를 내어주었다. 선박을 배당받은 사람들은 짐을 규제받아야 했으니, 사람을 더 안전하고 많이 태우기 위해서였다. 한 사람에게 배낭 하나에 무엇이든 3가지 이상은 못 넣게 했다. 어떤 이는 조상의 유골함을 넣어 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자식들의 추억이 깃든 기모노를 가져가기도 했다. ‘방어진 약도’를 그린 가츠에씨는 자신의 앨범과 국민학교 때의 성적표를 넣어 왔다고 술회한다. 이들이 떠난 방어진은 한동안은 찬바람이 불었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썰렁한 그 빈자리도 곧 채워져 갔다.

<장세동 울산동구문화원 지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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