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운 사람’의 개념은 1957년 고등학교 화학시간에 성함도 기억되지 않는 화학 선생님의 한마디에서 나왔다. ‘수, 나, 칼, 구 ,은, 금’ 하면서 원소주기율표를 외울 때, 원자번호(?)에 관한 설명을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전쟁터에서 사망한 모즐리(Henery G.J Moseley)를 ‘아까운 사람’이라고 했다. 전쟁이 아니었으면 화학과 물리학의 발전에 굉장한 기여를 했을 사람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6·25 전쟁이 아니었으면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장차 큰일을 했을 젊은이들이 얼마나 저 세상으로 갔을 것인가 안타까워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같은 논리로 정운용 선생이 그렇게 일찍 세상을 뜨지 않으셨으면 오늘의 저런 혼돈과 무례가 판을 치는 토론은 발을 붙이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솟구친다. 운동권 노동운동이 봇물 터지듯 몰려올 때에도 그는 노사문제에 관한 토론에서 사회를 보면서 거인처럼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예로서 그가 사회를 보는 토론에서는 두 세 명의 토론자들이 동시에 자기주장을 외치지도 못했고, 배가 산으로 가듯이 엉뚱한 갈림길로 빠지지도 않았다. 토론자 서로가 남의 의견을 경청했고, 반론의 초점을 발언자의 초점에 맞추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어쩌다 한 토론자가 방향을 잃고 상대방의 말꼬리 잡기 식으로 비틀어 나가면 사회자 정운용 선생은 조용하고 정확하게 길을 잃은 이 토론자를 본론으로 안내하였다. 특히 그가 토론의 주제에 관한 박사학위를 갖고 있을 만큼 전문가이어도 토론자들의 발언기회를 배분했지 한 번도 자기 의견을 비치지 않았다. 토론 사회자의 위치를 침착하게 지키고 있었다. 이 장면이 자꾸 되새겨 지는 것은, 현재도 모 ‘넓은 도시’의 선출직에 봉직하는 사람이 방송국에서 ‘OO의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는 토론 프로그램 사회를 보면서 어찌나 자주 자기 의견을 펼치는지 불쾌해 하는 사람들이 필자에게 지적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정치꾼이 사전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미리 얼굴 알리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세금을 내는 모든 국민이 분통 터질 일을 저질러버린 철면피 어느 정치꾼들, 필자가 명예훼손과 선거법 위반으로 소송 당할까봐 차마 이름들을 밝히지 못하지만, 저들이 몹쓸 병으로 지금 세상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아깝지 않을 사람이 국정감사장에 나와서 서류를 뒤적이고 있다. 그들의 눈길은 한 결 같이 방송 카메라를 의식하고 있다. 그들을 국회의원으로 뽑아준 유권자들을 이참에 망신을 주어야 한다. ‘뭐 이런 OO를 국회의원으로 뽑아주었어? 그 동네 유권자들은 못 먹을 것 먹고 그 OO를 찍어준 바보들이겠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아까운 사람 떨어트리면 안 된다. 고군분투하는 정치가가 남쪽 큰 도시에 있다. 안철수 의원 말대로 전과자, 특히 사내자식을 거짓과 꼼수로 군복무를 기피하게 시킨 잠재적 정치꾼들을 전과자 부류로 삼아 선거에는 얼씬도 못하게 해야 한다. 군대도 못 가게 꼼수를 부린 전과자 부모는 자식이 사회복지기금으로 살아가는 안쓰러운 모습을 보게 해야 한다. 단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양심적 젊은이들은 국가가 보장해주며.
<박해룡 철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