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두는 말(言)
곁에 두는 말(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2.22 18: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겨울 들면서 적잖이 부고를 듣게 된다. 친인척 외에도 그 중에는 얼굴과 이름만 아는 이도 있고 어떤 일로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가장 황망한 경우는 자주 소소한 일상을 나눈 적이 있는 사람의 부재를 알게 됐을 때이다.

얼마 전 마른 고추를 빻으려고 동네방앗간에 갔었다. 그 방앗간은 부부가 운영을 하고 있었는데 지난 가을부터 갈 때마다 주인아주머니 혼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하루 온종일 하는 일이 아니어서 주인아저씨는 다른 일터를 찾았을 것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그런데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지난 가을 갑자기 아저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 셋과 갑자기 남겨진 아주머니의 충격과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어 보였다. 갈 때마다 살갑게 곡식갈이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의 부재가 믿기지 않았다. 서운하고 안타까웠다.

지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는데 그야말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빻은 고춧가루를 들고 나올 때 나는 뭐라 한마디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주머니에게 간신히 “아이들을 봐서라도 힘내세요.”라는 말을 하고선 돌아 나왔다. 그 후 며칠 내내 사는 것이 시간의 외줄타기를 하는 것 같아 우울했다.

젊을 적엔 슬픔도 맑았다. 그리고 잠시 흐렸던 감정들도 이내 맑아져 어느새 다시 나를 일상으로 재빠르게 되돌려놓았다. 그것은 아마 어리석게도 놓쳐버린 그 무엇이라도 만회할 시간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슬픔은 농도가 짙다. 여과되지 않은 세월의 깊은 앙금이 있어 세상의 상처들이 쉽게 걸러지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부턴가 나에게는 ‘곁에 두는 말’이 생겼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별 특별할 것도 없이 어쩌면 흔하게 쓰는 말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나의 가슴에 어렵게 스쳐 지난 적이 있었다. 물론 매순간 이 말처럼 살 순 없겠지만 모든 것이 시들해지고 방만해져 일상이 지리멸렬하게 느껴질 때 잠에서 깨듯 화들짝 나를 깨워 돌아보게 하는 경고등 같은 것이다.

살다보면 어느 순간 직간접적인 어떤 계기로 전광석화같이 가슴을 치거나 잔잔히 마음을 흔들어 깨우는 한마디 말이 마음에 꽂힐 때가 있다. 그럴 때가 있었다면 한마디쯤 꼭 붙들어 곁에 둘 일이다. 혼탁한 개울물이 흘러서 맑아지듯 그 한마디로 우리의 삶이 끊임없이 자정되고 성숙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질병 재해 돌연사 등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외일 수 없다. 젊음에서조차도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언젠가 갑자기 우리가 맞게 될지도 모를 세상과의 이별이 조금은 덜 아쉽고 후회스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잠 못 드는 사람에겐 기나긴 밤이여

지친 나그네에겐 머나먼 시간이여

불멸의 길을 찾지 못한 이에겐

너무나 길고 지겨운 이 삶이여

<법구경>

어리석은 이에게 주는 간절한 가르침이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새벽공기는 아직도 매섭다. 분주하고 들떴던 설명절을 지나고 나는 오늘도 여느 때처럼 따뜻한 사람들과 만나며 평범한 일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정미 수필가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