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시험을 보고 합격을 하고 집을 구하고 대학원 공동 실기실에서 작업을 했다. 휴학 없이 이어달리다보니 전환점이 필요했고 어학연수를 선택했다. 대학졸업 후 서울로 왔을 때에야 비로소 처음 ‘지방대’에 대한 세상의 인식을 실감하게 됐다. 당시 필자는 그런 인식에 놀라고 위축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어학연수를 통해 더 큰 세상을 보고 오자 그런 건 티끌중의 티끌임을 알았고 그 때부터 그런 인식에 휘둘리지 않을 내성까지 생겼다. 영국에서의 시간은 정말이지 꿈같았다. 오직 공부와 생활에 충실하고 즐겁게 지내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연수를 마치고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현실에 대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학교는 어찌 할 건지, 졸업 후엔 뭘 할 건지, 남자친구는 있는지 없는지, 결혼은 언제 하는지 안하는지. 다양한 모양의 ‘뾰족한 수’에 대해 사람들은 묻고 또 물었다.
그런 경험 덕택에 필자는 학생들에게 학교를 마치면 각자 나름의 뾰족한 수를 지니고 있다가 사람들이 그걸 보여 달라고 할 때 보여줄 수 있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해 준다. 그렇지 않으면 끝없이 괴롭힘을 당하거나 상처받을지 모른다고도 말해 준다.
종강과 함께 1년간 내게 배운 학생들과 시간을 가졌다. 스물둘, 스물셋, 스물넷 내가 세상을 모르던 그 때 그 나이다. 세상 모두가 꿈으로 가득할 나이다. 하지만 그들이 앞으로 만나게 될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몇 년 예술관련 학과의 취업률로 학교 평가를 하고 취업률이 낮은 과를 없애거나 없애려 해 반발을 산다는 기사를 여럿 보았다. 예술가와 취업은 별개다. 그럼에도 취업을 예술가의 자질 판단의 잣대로 이용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아마 취업을 했다는 학생들도 비정규직이거나 계약직일 것이다.
미술대학을 졸업한다는 건 어쩌면 부싯돌을 쥐고 세상에 나가는 것과 같지만 누구도 부싯돌을 제대로 부딪칠 수 있는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누군가는 성냥으로 불을 피우고 누군가는 라이터를 쥐고 있을 테지만 시간이 지나도 우리들의 손에 들려있는 것이 초라한 부싯돌이라면 남들보다 수백 번 수천 번 불을 피우기 위해 돌을 부딪치는 수밖엔 없다. 그러는 동안 성냥이나 라이터를 가진 이들이 부러워 당장이라도 내던져버리고 싶을지라도 성냥이 다 타버리고 라이터의 기름이 다 돼서 더 이상 리필 할 수 없게 될 때 우리는 여전히 이미 수없이 부딪쳐 이젠 불 피우기가 쉬워지기까지 한 부싯돌을 가지고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을 필자는 ‘희망’이라 부르고 싶다. 다만, 부싯돌을 가진 사람에게 세상은 이 겨울날 날선 바람처럼 혹독하고도 혹독한 것이 될 것이리라.
<이하나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