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학습금지법’ 유감
‘선행학습금지법’ 유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11.1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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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까지 없었는데 요즘 학교마다 새롭게 생긴 풍속도가 하나 있다. 중간평가, 학기말·학년말 평가 등 전 학년이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실시하는 지필식 평가에 즈음해 새로 생긴 모습이다. 시험을 시행하기 전에 ‘나이스’ 시스템에 맞춰 진도를 잡느라 야단법석을 떠는 일이다. ‘나이스’에는 교무, 학사, 학생들의 학적과 건강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교육과정과 관련해 학급별 시간표와 진도표까지 포함돼 있다. 그래서 학년별로 시험범위를 정하는 회의를 할 때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것이 나이스에 올라와 있는 진도표와 실제 수업진도에 차이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실제로 수업을 하다보면 학교행사 등의 사정으로 인해 계획대로 수업진도가 진척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학년 초 계획에 없었던 행사가 생기기도 하고 아이들이 수업을 어려워할 경우 1시간 동안의 수업내용을 2~3시간 반복하다보면 수업진도가 계획과 맞지 않는 경우가 더러 생긴다. 반대로 아이들이 빠르게 이해하고 학습내용을 잘 받아들이면 계획서에는 수업이 2시간으로 돼 있지만 1시간에 끝내고 다음 진도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나이스’의 진도와 실제 수업진도에 차이가 생기게 되는데 지필식 시험에 대비해 이 부분을 조정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하지만 시험범위에 맞춰 진도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도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자칫 진도가 앞서 나가면 ‘선행학습 금지법’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일어나는 이 ‘나이스’와 실제 수업과의 진도 맞추기는 학생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법률에 맞추기 위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실제 수업과정과 ‘나이스’에 계획돼 있는 과정을 맞추느라 일선 교사들이 적잖은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이 법의 애초 목적은 과도한 선행학습을 금지해 가계에 큰 부담을 주는 사교육비를 줄이고 공교육을 정상화하는데 있었다. 하지만 이 법이 시간이 지날수록 학교 현장의 여유를 억누르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으니 문제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이 되면 벌써 중학교 1학년 수학은 물론 2학년 2학기 수학까지 배우는 아이들이 있는 마당에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수업활동 중 담임교사가 1~2시간 정도의 수업시수마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과 수업을 하다보면 계획서대로 진도가 척척 들어맞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때로 아이들의 열성적인 수업활동과 배움에 대한 의욕으로 수업진도가 늦어지거나 통합해서 운영해야 더욱 효율적인 수업이 되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이럴 때마다 항상 ‘나이스’에 들어가서 이게 수업진도와 맞는지 하나하나 따져야 하니 이를 감당해야 하는 교사들이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도를 넘는 선행학습은 학교교육에서 흥미와 관심을 앗아가게 되고 결국, 학습효과를 심각하게 떨어뜨린다. 또 극단적인 무한경쟁을 부추기고 학생들의 정상적 발달을 저해하는 주범이다. 따라서 ‘선행학습 금지’의 근본취지는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학벌지상주의와 무한경쟁, 행사중심의 교육활동을 통한 학교 서열화 등 선행학습 유발 요인은 더욱 강화돼 가고 있다. 이런 마당에 보이는 현상만 억눌러서 바로잡겠다며 학교 현장에 ‘선행학습 금지법’을 내밀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이러다간 자칫 학교현장의 작은 틈조차 막아버리는 게 아닐까 심히 우려될 정도다. 지금 중요한 것은 ‘선행학습금지’라는 법안이 아니라 선행학습이 소멸할 수 있는 사회분위기를 먼저 만드는 것이다.

<김용진 화암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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