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왕의 전사에 남부여군은 충격에 빠졌다. 지휘부가 충격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이 김무력이 이끄는 신라군은 군사를 휘몰아 관산성의 탈환을 위해 총공세를 폈다. 사기가 오른 신라군 앞에서 남부여군은 힘없이 쓰러졌다.
이때 관산성 동문 쪽을 지키고 있던 다라국 병사들은 신라군과 맞서고 있었다. 성문이 파괴되고 밀려오는 신라군과 맞붙어 백병전을 벌리다 많은 병사들이 죽었다. 진파라 하한기는 자신에게로 밀려오는 적군을 피해 성벽 쪽에 몸을 숨겼다.
밤새 계속된 전투에서 휘하 병력이 많이 죽었다. 시체 더미 속에 엎드려서 위기를 피한 진파라 하한기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동문에서 서문 쪽으로 가는 중간쯤에선 아직도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휘하의 다라의 병사들이 보였다. 적의 장군들은 아직 말을 탄 채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한 명의 목을 베면 또 한 명이 목이 베이는 싸움이이 계속되고 있었다. 쓰러진 다라의 병사의 몸 위에 또 병사가 쓰러졌다. 처참했다. 가라국의 고능파 장군도, 아라국의 병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성루엔 신라군의 깃발이 꽂혀 삭풍에 휘날리고 있었다. 진파라는 온몸에 엄습해 오는 추위를 느꼈다. 몸이 떨렸다. 마음도 떨렸다. 이미 기울어진 전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살아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친화를 주장했던 그 나라에 투항하여 오늘의 승전 장수인 김무력의 환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다.’
진파라 하한기는 자신이 엎드려 있던 죽은 병사들의 시체 더미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동녘이 밝아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새벽인 것 같았다. 모두가 죽어 있는 가운데 오는 새벽, 진파라는 다라국의 병사들이 아직도 안간힘을 싸우고 있는 곳을 한번 다시 바라보고는 발을 돌렸다. 그리고는 성루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누구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성루 앞에 이르러 그는 허리에서 칼을 뽑아 버리고 성루로 올라갔다. 그리고 백기를 빼어들고 흔들었다.
김무력은 진파라를 반갑게 맞았다. 아라(함안가야)군의 탁필공 장군도 이미 김무력 옆에 서 있었다.
신라군에 편입된 진파라는 태자 부여창이 전장을 지휘하고 있던 백제군 본영인 백골산성을 공격하는 선봉에 섰다. 마지막 항전을 벌리던 남부여군 주력부대도 신라군의 사기 앞에선 힘없이 쓰러졌다.
붙잡힌 백제의 장수들은 무참히 참살되었고 성왕의 목은 전리품이 되어 서라벌로 옮겨졌다. 좌평(장관) 4인과 2만9천6백 명의 병력을 잃은 부여창은 겨우 4백 명의 병사와 함께 전장을 탈출하는 광경을 진파라는 이제 승자의 측에 서서 바라보았다.
글=이충호/그림=황효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