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상
가을 단상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10.01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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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을 적어보는 ‘버킷 리스트’가 몇 해 전 유행하더니만, 올해 들어서는 루게릭병 환자를 위한 ‘아이스 버킷’이 유행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북 버킷’이 유행이라고 한다. 페이스 북에 간단한 이유와 함께 ‘내 인생의 책’ 10권을 고른 뒤 이 놀이를 이어갈 사람을 2, 3명 지목하는 것이란다. 그 기사를 보면서 한 동안 잊고 지냈던 젊은 날의 지적 허영을 채워주었던 책들이 생각났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한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글귀이다. 대학시절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며 방황하던 시절, 화두처럼 필자의 머리 속을 헤집고 다니던 문구이다.

달아나고만 싶었던 그 당시의 답답한 생활환경에서 이 세계를 부수어버리고 날아갈 ‘아프락사스’란 신은 도대체 무엇일까를 고민했었다. 내가 속해 있는 이 세계는 마냥 무의미해 보이기만 하고, 이런 의미 없는 삶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나날을 보내는 무기력한 자신이 싫어 막걸리 주전자 속으로 달아나기만 했었다.

‘헷세’, ‘앙드레 지드’, ‘까뮈’, ‘토스토에프스키’, ‘최인훈’, ‘이청준’ 등 한 동안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지만 오히려 갈증만 더할 뿐이었다. 그래서 이런 저런 현학적인 철학이론들 속에서 헤매다 만난 존재 이유 찾기의 종착역은 실존주의였다. 어떤 이론도 존재의 본질을 명확하게 설명해주지 못했기에 결국 필자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적 명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살았던 이유는 내 삶은 일회적이고 유한하며 이것만이 온전히 내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 삶의 의미는 내가 스스로 만들어 갈 수밖에 없고, 그러기 위해서는 주어진 상황, 주어진 순간 속에서 스스로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 혼자 선택하여야 한다. 그래서 신을 믿는 자는 자신을 ‘신 앞에 선 단독자’라고 하고 신을 믿지 않는 자는 인간을 ‘자유에 의해 처형되어진 존재’라고 한 글들이 가슴에 와 닿았다.

외로워 한껏 껴안아 보지만 힘껏 껴안을수록 그의 가시가 더 자신의 가슴을 찌를 뿐이라는 고슴도치의 사랑을 나름 이해할 수가 있었고, “우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정현승 시인의 시 구절에 눈물을 흘리곤 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필자가 선생이 되고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이 가을에 새삼스럽게 다가와 선다. 요즘 학생들은 영상세대라 책보다는 동영상이 더 와 닿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면서도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데 연애 소설 하나 제대로 읽지 않는 세태가 조금은 걱정스럽다.

지적 욕구란 한번 맛을 알게 되면 계속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고등욕구이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는 요즘 학생들은 즐기기 위한 현재만 존재할 뿐, 의미를 추구한다든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일에는 도통 무심한 듯하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걱정스러운 마음에 가끔 필자의 젊은 시절 방황을 이야기해 주며 책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지만 별 반향이 없다. 필자가 보다 절실하게 그들을 불러주지 않은 탓일까.

<최순호 울과대 물리치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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