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회-5.부왕의 죽음(4)
52회-5.부왕의 죽음(4)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8.12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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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왕자가 직접 개국이래로 대대로 내려오던 나라의 보물과 국서를 모두 서라벌로 가져가니, 서라벌의 왕은 예절을 다하여 환대하며 구해왕에게 상등(上等)의 위(位)(벼슬)를 내리고 그의 옛 나라 땅을 식읍으로 내렸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들들에게도 각간의 벼슬을 주었다고 합니다.”

상수위의 말이 공허하게 정전을 울렸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진수라니 한기도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무언의 순간에 각자의 가슴 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진수라니는 마음을 정리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잊을 것은 잊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는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남가라국(금관가야)은 우리 선조들의 땅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이 그곳에서 나와 지금 이 나라를 세우지 않았던가. 비록 우리가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나 우리는 그 모국의 그늘 아래서 많은 영향을 받아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의 뿌리였던 그 나라가 날로 쇠퇴하고 그 국운이 기울어 가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겠나. 인간에게도 운명이 있듯이 한 나라에도 운명이 있지 않겠느냐. 운명이 거기까지라면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나. 남가라국의 운명이 거기까지인 모양이다. 이제 남가라국에 대한 미련과 비통함을 버려라. 이제는 한 나라의 비운을 슬퍼하고 아쉬워하기 보다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를 생각하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진수라니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상수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전에 모인 대신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다짐이라도 받듯 한 사람 한 사람씩 스쳐가는 진수라니의 시선에 대신들은 모두 깊게 고개를 숙였다. 진수라니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남가라국의 운명이 우리의 운명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남가라국의 이번 일을 우리의 방어력을 튼튼히 하고, 2백년 사직의 이 다라(합천가야) 왕국을 더 굳건히 지키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군사력을 더 강하게 하고 더 많은 칼과 창을 만들도록 하라. 밤을 새워 쇠를 제련하고 갑옷과 무기를 만들어 산성과 군영마다 무기가 넘쳐나게 하라. 그리하여 어떠한 무리가 침략하여 오더라도 단숨에 물리칠 수 있는 대비를 하도록 하라.”

진수라니 한기의 말은 어느 때보다 비장하게 들렸다.

“미리 대비하는 것만이 전란을 이기는 최선의 방도가 될 것이기에 국법을 더 강하게 하여, 나라에 해를 끼치고 이적행위를 하는 자는 참형에 처할 것이다. 그것이 이 나라가 가야할 길이며 지하에 계신 선왕들이 바라는 일일 것이다. 자, 다들 고개를 들고 일어나라. 일어나서 저 궁성 밖으로 나가 이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도록 하라.”

진수라니는 말을 끝내고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습관처럼 옆에 찬 환두대도를 뽑았다가 다시 꽂으며 정전 밖으로 나갔다. 대신들도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진수라니는 고개를 들어 멀리 장대한 산의 능선들이 찬란한 햇빛 아래 힘차게 굽이치며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글/이충호

그림/황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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