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질투를 넘어
상실과 질투를 넘어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10.2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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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 번 독서회를 간다. 독서회의 좋은 점은 모두 알다시피 편식하지 않는 책읽기다. 책을 고르는 것도 취향과 습관이 생기기에 독서회 활동은 의미가 깊다. 다른 이가 추천한 책을, 의무감이 섞인 태도로 읽다보면 어느새 책갈피가 술술 넘어간다. 이번 달 독서회에서 같이 읽은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였다. 선 인세가 십억을 넘었느니, 오랜만에 사람들이 서점에 줄을 섰느니 하는 따위의 화제를 몰고 다닌 터라 흥미를 가지고 읽어 내려갔다.

요 근래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답게 촘촘하고 찰진 구성과 더불어 매력적인 인물들이 다가왔다. 하루키의 짧은 글귀는 잠언처럼 속 깊었다. 일본인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인공을 비롯하여 주변 인물들의 상황과 이야기가 쉼 없이 터져 나왔다. 색채를 잃어버리고 생활인이 돼 버린 친구들의 모습은 힘을 잃은 지금의 일본을 투영해 놓은 듯했다. 문학에 음악을 버무린 솜씨는 여전했지만 노벨문학상을 탈 만큼 글로벌한 위대한 인물도, 보편타당한 심오한 철학도 보이지 않았다.

일 년에 한 번, 가을 무렵이면 노벨 문학상이 발표된다. 우리나라 작가 중에는 아직 받은 사람이 없다보니 이맘때쯤 연례행사처럼 사람들은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작가들을 들먹이곤 한다.

후보 물망에 오른 몇몇 원로시인이나 소설가의 이름은 메인 메뉴가 되지 못한 채 계절 메뉴로 남는다. 번역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작품의 깊이와 지속성을 말하고, 국가의 힘이 회자되기도 하지만 몇 년 동안 모두 틀리지도 모두 맞지도 않은 상황이 계속됐다. 지난해 중국 작가가 받은 후에 조바심은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하다. 일본문학이나 중국문학의 역사보다 뒤질 것이 없다지만 되짚어볼 일도 많을 것이다. 외국어를 잘하는 세대들이 많아지고 문학 교류도 활발하지만 아직은 역부족이지 싶다.

특강을 하던 시인은 시집을 누가 읽는지 아냐고 물었다. 다름 아닌 시인들이라고, 일반 독자들은 결코 몇 천원밖에 하지 않는 시집을 안 산다고 했다. 시인은 그래서 시를 쓸 때 자유롭다고, 몇 만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시를 읽는다면 시를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시인의 일갈이 시인의 자조 섞인 한탄인지 비아냥이었지는 모르겠다. 시인의 말은 아팠지만 사실이었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은 무색해졌다. 연중 내내 책을 읽어서가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 것이다. 시를 읽는 이가 시인밖에 없듯 소설을 읽는 이가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어린이 책이나 실용서적이 많이 팔리는 현실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일 년에 책을 한 권도 발간하지 못하는, 무실적 출판사가 94%라는 뉴스를 봤다. 소규모 출판사들이 경쟁력을 상실한 이유가 인터넷 서점과 대형출판사의 횡포에 가까운 독점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책을 소비하는 독자의 책임도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울산에 들어선 대형서점이 반가우면서도 직접 간 것은 몇 번 되지 않는다. 그저 클릭 몇 번으로 출판사의 홍보문구를 보고 책을 구입했다. 얼마 전에 생긴 대형서점의 중고점을 이용하긴 했지만 다양한 분야의 알록달록한 책표지를 직접 보고 고르는 재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얼마 전 들른 파주출판도시 북소리 축제에 가서도 눈으로만 책을 보고 왔으니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노벨문학상을 타는 일이 유일하고 최고 목표인 작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저 상이라는 것은 묵묵히 문학의 길을 가는 이에게 찾아오는 멋진 행운이리라.

비록 올해 노벨문학상을 타지는 못했지만 고은의 시를 읊조리고, 조정래의 유려한 대하소설을 읽으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황석영의 남다른 포부에 가슴을 펴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해본다. 노벨문학상을 주는 이는 다름 아닌 우리라는 생각도 곁들어 하길 권한다.

가을 햇빛이 비추는 오후, 아는 이에게 문자를 보내보자.

“우리 오늘은 서점에서 만나요!”라고.

<박기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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