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서 자유로운 것들
없어서 자유로운 것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9.01 19:4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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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후배를 만났어요. 서너 살 정도 된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식사를 하러 가는데 후배는 식당 앞에 유모차를 세워놓고 아무 장치도 해두지 않은 채 가려는 거예요. 지하로 내려 가야 하는 곳이고 이렇게 방치해두면 도난당할지 모른다며 걱정했지만 길에서 주운 거라 아무도 안 가져갈 꺼라며 소리내어 웃습니다. 얼마 쓰지도 못하는 유모차를 고가에 사는 요즘 젊은 엄마들과 달리 후배의 털털하고 검소한 모습이 신선했습니다.

사물에게 갖는 감정과 마음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 물건의 가격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소중함의 크기도 달라질 수 있겠죠.

영화 ‘은교’에서 은교는 엄마가 선물한 ‘하나뿐인 거울’을 낭떠러지에 떨어뜨리는데 노시인 이적요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 손거울을 주워 줍니다. 시인의 제자 서지우는 그깟 거울이 뭐라고 스승을 위험에 빠뜨리냐며 은교를 닦달합니다. 선생님한테는 똑같은 거지만 나한테는 저승과 이승만큼 먼 거라 은교는 소리칩니다.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어 보이는 물건이라도 또 다른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의미라는 것은 흔하다거나 낡았다는 것에 대한 기준은 아닙니다. 마음에 넣고 오래두면 의미가 커진다는 걸 경험할 수 있는데 사람이나 기억도 마찬가지 일 수 있습니다.

단지 조각이며 그저 스치는 존재 일지라도 오래도록 마음에 두고 새기면 언제 꺼내보아도 늘 생생한 ‘새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은 마음에 새길 여유도 꺼내볼 시간도 없어 보입니다.

오래된 물건으로 인해 난감했던 경험 있으신가요? 사실 제가 그렇습니다.

저의 핸드폰은 몇 년 전에 유행했던 옅은 핑크색의 고아라 폰입니다. 터치식이 아닌 버튼식이죠. 요즘 스마트폰 없는 사람 없지만 딱히 사용함에 불편이 없고 멀쩡한 물건을 남들 따라 바꾸고 싶지도 않아 아직 예전기종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주변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아직도 이걸 쓰냐는 놀라움은 기본이고 카톡을 하지 않으니 카톡으로 공유되는 인간관계는 모두 ‘off’입니다. 문자로 전송받은 기차표를 역무원에게 보여주면 화면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엄지와 검지를 움직여 화면을 크게 보려는 시도를 하고, 친구와 함께 사진을 보다가 액정이 꺼지자 어디를 눌러야 할지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보이스 피싱(voice fishing)에 이어 등장한 신종 스마트폰 사기 스미싱(smis hing) 등을 당할 일도 없고 시도 때도 없이 오는 카톡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판화작업을 한다고 했을 때 특히 목판화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가끔 비슷한 반응을 보입니다. 전통적이든 정통적이든 새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고루하다거나 시대에 뒤떨어진다거나 간혹 그 힘든 걸 왜 하냐는 반응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희소성은 커질 것이며 가치는 올라갈 것입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핸드메이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세상이 빨라질수록 사람들은 느림을 동경하게 되겠죠.

남들과 같지 않다는 것, 남들보다 조금 느리게 산다는 것에는 일정부분의 순수함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남이 쓰다버린 낡은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다녀도 유쾌할 수 있고, 흔해 빠진 손거울을 위험을 무릅쓰고 가져다줘도 으쓱해 하며 기쁠 수 있고, 구닥다리 핸드폰을 쓰면서도 신상 공짜 폰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그런 것들 말이죠. 창작활동을 이어간다는 것도 그렇겠구요.

갑자기 몇 해 전 영어유치원에서 가르쳤던 일곱 살 남자아이가 떠오릅니다. 또래에 비해 큰 덩치와 깔끔한 이미지, 의욕도 남달랐던 Brody는 영어공부도 열심히 하는 아이였습니다.

그런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거예요. 깜짝 놀라 다가갔더니 손목을 부여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더라구요. 손목이 다친 건지 어디가 아픈 건지 물었더니 Brody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엉엉, 이 시계가 얼마짜린데… 엉엉… ”

손목의 명품시계는 줄이 끊어진 채 망가져 있었고 그 일이 너무도 슬펐던 일곱살Brody.

선생님한테는 똑같은 거지만 나한테는 저승과 이승만큼 먼 거라 은교처럼 소리치지는 않아 다행이었어요.

하지만 Brody도 언젠가는 없어서 자유로운 것들에 대해 알아가겠죠.

<이하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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